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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운 육기 - 10 -

꿈과인생 2009. 12. 24. 11:00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감명스럽게 읽었던 책 중에서 감동스러운 장면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몇몇 타고난 영적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교통할 수 있는 성인이

어느 의사에게 나타나서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성인이 의사에게 들려준 말이므로

같은 의사로서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읽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맥도널드 베인의 "Beyond the Himalayas(히말라야를 넘어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병을 고치는 힘과 진리를 전해주는 힘을 누구나 타고 난다.

神癒 가운데에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만도 하다.

그 때문에 회의가 생기고, 신유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놀라운 치유의 본질을 부정하려는 온갖 시도가 있어 왔던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는 시어머니, 남편, 아들 이렇게 4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위암에 걸렸습니다.

위암 선고를 받고 굉장히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그만 남편과 집을 뛰쳐 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집을 뛰쳐 나온지 6개월만에 위암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이 여자는 시어머니를 마치 벌레처럼 싫어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여자도 문제고 또 그 시어머니도 문제였지만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얽히고 설켜서, 암이 조장되는 환경이라는 것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암이 나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간암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공을 드리다가 자궁암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어떻게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우리 한의사들은 양방에서 하고 있는 세계보다는 더욱 깊은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경락 세계를 탐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욱 더 깊숙한 본질적인 것은 없는지... 

 

 

"신유는 어떠한 물질적 방법을 써 보아도 낫지 않는 질병에 놀라운 효과를 눈으로 보게 해주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거대한 영의 힘에 아직도 눈뜨지 못했다.

그 까닭은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넘어선 세계에까지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까지 厥陰・少陰・太陰...등을 이야기 한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마음의 장난입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은 생각도 되고 추리도 되고 또 이것이 조화를 하여 하나의 선도 이루고 악도 이룹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개종을 했습니다"

불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천주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이것은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자로부터 자유스러워졌느냐?

그렇지 않지요.

다른 여자와 사귈 뿐입니다.

그러니까 대상만 바뀌었지 마음이라는 문제를 한번도 해결해 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들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심지어는 의학을 공부하는 여러분들까지도

그러한 신유라든가, 근본적인 도리, 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陰陽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善惡이전의 에덴동산, 至人, 眞人에 대한 이야기도 먼 산 속에나 있는

達人의 경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의사도 엄밀하게 따지면 의사가 아니라 환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의사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환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나,

이론을 알지 못하는 것이나,

이론은 넘어선 것은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전의 것을 마음이 알 수가 없지요.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실로 그와 같은 영역에서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았다고 하는 자가치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은 하느님이 고치고 돈은 의사가 받는다"

영국에서 이런 얘기도 있지요.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술을 끊으십시오"하니까 환자가 그냥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환자를 불러 세우더니 "뭘 잊어 버리신 것이 없으십니까?"

"잊어버린 것이 있다니요? 전 아무 것도 잊은 것이 없는데..."

"돈을 내고 가셔야지요"

"저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충고해 드렸잖아요"

"나는 당신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낼 필요가 없지요" 

 

요즘 의사들의 현재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배양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몇 가지 된다 안된다 하는,

어찌보면 뻔한 것을 팔아 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환자들로 하여금 이런 체질에는 이런 것이 맞고 저런 체질에는 어떠한 것이 맞는다고 하는 교육도 필요할 뿐아니라

모든 병은 이러이러한데서 온다고 하는 자체 원인의 근본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교화작업이 필요합니다.

목사나 승려들이 다하지 못한 분리없는 마음에 대한 깨우침을 우리 한의과 학생들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 있는 어떤 문제를 떠난 상태, 초월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현상이든 모두가 스스로 지혜있는 법칙에 의하여 나오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가령 자네가 어떤 일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무엇인가를 믿고 있으면,

거기에 어떤 크나큰 지혜가 작용하여 자네가 두려워하거나

또는 믿고 있는 그것을 바로 만들어 내고 만다.

이것이 상념의 법칙내지 전자작용의 법칙이다" 

 

 

소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파도 즉 염파,

이것이 의사에게는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함과 동시에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인간,

그것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잠잘 때나 앉을 때나 설 때나 데리고 다니는 근원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한다 이거지요. 

 

 

"수학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것이다.

진리와 진리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진리의 법칙을 이해할 수는 있다..." 

 

 

지금 이 성인은 인간의 질병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질병을 보더라도 질병 자체를 건강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말고

'질병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창조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저는 한의과 학생들에게 수차에 걸쳐서 어느 한 쪽 분야만 지망하지 말고, 종합과를 지망하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별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간장암만을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간암이 가지고 있는 독소를 한 경락으로만 받게 되어 큰 병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종합과를 다루고 있는 의사는 큰병에 걸리지를 않습니다.

요즘은 자꾸 분업화 되어서 '내가 하는 일 이외에는 모른다'라고 하는데

분명히 마음의 어떤 에너지도 한 곳으로만 쓰게 되면 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분리 편재된 마음의 에너지 때문에 오는 것인데

사실 의사라고 하는 것은 질병 때문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질병의 근본인 에너지의 편재

즉 마음을 잘못 쓰는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죠.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눈을 거꾸로 돌려서 내면의 세계를 주시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속은 것이 되고 설령 여기에서 사암침법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볼 때 각자의 관념이 작용하게 되어서 엉뚱하게 환자를 고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Ego를 투영시키는 이상한 의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시로 마음이 일으키는 질병을 전부 없앨 수 있는 비결은 없겠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인들의 결과이고, 자연의 법칙을 어기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무지, 공포, 사랑의 결여 곧 사랑을 주는 힘의 결여,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다.

병은 육체와 마음이 그 본래의 리듬을 잃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며,

동시에 그것은 본래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싸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 허둥댄다면

마음의 주의는 나타나는 증상에 쏠리게 된다.

왜냐 하면 육체가 신경을 통해 그 증상을 마음에게 알리면

마음은 육체가 느끼는 것의 포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육체를 그 증상에서 구해내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의 원자들을 휘저어 놓고 결국은 고통이나 불쾌감이 오게 하는 것은

마음이 육체를 구해 내려는 그 싸움이다.

이런 이치를 알 때 싸움은 멎는다"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체했을 경우 痛處에 마치 물고기를 들여다 보듯이 가만히 관하는 방법,

그것이 뒤에 염화약방문에도 나오는 "정심주"라는 방법입니다.

病處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병명이 무엇일까?

원인이 무얼까? 하는 수많은 질문에 부딪히게 되지요.

그러나 그 원인을 알아 내려고 하는 노력 또한 또 하나의 마음이므로

그것 마저 떨구어 버리고 관하는 것입니다.

禪家의 禪師들은 처음 禪家에 입문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많이 해줍니다.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떻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떤 구박을 받고 자랐고,

집안 식구들은 어떻고, 애인도 나를 배반하고...

그러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시기가 되면 일체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에 대답하여 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禪師들은 알고 있지만 처음에는 대답을 해주는 거죠.

처음부터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범부들에게는 무리이니까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이 사람은 질문을 부여안고 끙끙 앓다가

질문을 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차차 공부를 하다보면 집안의 문제, 애인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모든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또 문제의 해결도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舍岩針法이라는 문제도 모든 사람의 병을 보는 것도

여러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야지

결코 교수이든 누구이든 타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하나의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버리고 또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이론에 집착을 하면 큰일나지요. 

 

 

"마음은 육체의 느낌을 의식하고, 그 느낌이 어떤 '병'으로서 마음에 기록되며,

거기에 어떤 병명이 붙으면 마음은 그 병명에 사로잡히고,

더구나 그것이 어떤 불치의 병이라 하게 되면

마음은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 부담은 더더욱 커진다" 

 

 

제가 누차에 걸쳐서 양방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양방병명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어떤 환자가 왔을 때 이것을 비만증이라고 해야 할까?

陰虛라고 해야 할까? 陽虛라고 해야 할까?

자꾸 우리 의사들은 어떤 증상에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이때 병명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실재 모습을 보는데서 멀어지게 되지요.

환자를 보면서 "象에서는 어떠했고 五運六氣는 어떠했고, 六氣는 어떠했으므로 이 사람은 이런 체질이다"고

딱 규정을 짓는 순간 여러분은 실상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少陰人, 太陰人, 太陽人, 少陽人이라고 하는 四象이 難變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는 것, 諸行無常이 참 진리일진대

모든 것을 고착적으로 결정해 버린다는 것은 우둔한 의사의 모습일 뿐입니다. 

 

 

요즘의 의사는 환자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혈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므로 X-ray를 찍어 봅시다,

가슴 속의 덩어리가 혹시 암이 아닐지 모르겠군요, 정밀검사를 해봅시다"등등

이런 공포의식은 마치 인간이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목사나 승려,

신부라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그 티켓을 따낼 수 없다는 논리와도 똑 같습니다.

요즈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부 이러한 공포의 변형된 실체,

공포의 변형된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 이전에

"이 약을 먹어야 됩니다"라는 겁을 던져주는 것이지요.

이런 공포는 심리적인 이득,

물질적인 이득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말하기를

"항상 공포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심리적 존경 내지는

물질적인 것을 얻고 싶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자꾸 습관화가 되면 재미가 붙게 되고

그러다보면 환자나 의사나 모두 찐득찐득한 업의 수레바퀴로 기어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환자를 볼 때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고 또 불치병이라고 하는 선고를 함부로 내리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억지로 희망을 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병이 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환자 스스로가 모든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 가정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누가 누구를 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장손이면서도

제사에도 안 가는 엄청난 불효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습니다.

같은 서울 시내에 살면서도 서로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께서 방광암에 걸려서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무슨 방법이 없을까해서 저를 찾아온 것이었지요.

저는 미리 예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올 것이 온 것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

사실 제 가족의 욕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 성격이기 때문이니까 그냥 들어두십시오.

저의 아버님의 성격은 긴장이 많고 공포가 많고 조심이 많은 성격인데

금방 어머니와 몽둥이를 들고 싸우다가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My darling"하면서

맛있는 것 좀 내오라고 졸지에 표변할 수 있는 교활성,

가족들에게 집안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바깥에서는 체면 세우느라고

사랑이 넘치는 행동을 하는 이런 이중성을 저는 어려서부터 보아왔기 때문에

저것이 언젠가는 병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방광암에 걸려서 왔더군요. 이것은 사형선고입니다. 

 

 

"방광암은 불치입니다. 잘라내야 합니다"하고 양방의사들이 관념을 딱 넣어주니까

저와 한 달간 입씨름을 했는데도 결국은 자르고 말더군요.

그러더니 지금은 후회를 하는 겁니다.

소변기를 옆에 지니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진리에 가까와지면 질수록 제일 믿어주지 않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특히 사촌이나 동생, 아버지, 어머니를 치료할 때 전혀 믿으려고 하지를 않죠.

도나 진리를 공부하는 초반전에는 가족들에게서 받는 고통은 대단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모는 비록 자기 자식이지만 손아귀에서 떠난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애정이 참 사랑이 아닌 소유일 뿐이거든요.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날 도를 공부하고 진리를 공부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

그만 자기에게서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식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양방의들의 말을 듣고 방광을 떼어내고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관념을 여러분들이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의사들이 먼저 공포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며 정말 죽음과 삶이 분리가 되어 있는 것인지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실제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이 그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처음 들으니까 신선한지 몰라도 저는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므로 지루할 뿐입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들 손에 칼을 그냥 쥐어주고 싶고 물감과 붓을 그냥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려 놓은 그림만 그냥 구경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을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여러분들 마음에 是非之心만 들끓을 뿐이지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던 친구가 개업하고 나서 환자들이 많이 밀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학교 다닐 때 바보 같았다고 욕을 해서 될까요?

여러분들은 아는 것만 가지고 학교에서 1등을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환자를 향한 사랑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환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그런 기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舍岩針法 강좌를 하면서 인간이 가진 靈性에 대하여 단순히 몇 개의 이론이나

박학다식한 이론관을 창조하여 내었다면 이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 안토니오가 이야기 하는 기발한 질병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 듣기 힘든 것인데

저는 이 안토니오의 질병관이 시금석으로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병의 원인이 자신의 참 모습(實相, 自我)에 대한 무지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때는 그 무거운 부담이 사라지며, 대 생명인 한얼이 마음을 變性시켜 육체는 자연의 완전한 작용에 순응하게 된다" 

 

"인간은 육체에 이상이 있으면 병으로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질문자는 영국인 의사로서 티벳 지방을 여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책을 낸지는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최근에 번역이 되었지요. 

 

"그렇지, 육체의 세포사이에 어떤 분리가 생기면 그것은 뇌의 중추에 전달된다.

그러면 마음의 현재 의식이 그것을 불건강으로 인식한다.

근본적으로 한얼, 곧 인간의 참 모습인 완전한 힘을 깨닫지 못한 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났다.

그러나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뇌 중추에 전해지고 그리하여 육체 세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불교인도 있으며 이 派도 있고 저 派도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자기가 속한 곳의 편을 들어 과다하게 다른 부분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리 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한의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의사 이전에

비열하고 자기 Ego적이고 분리의식에 가득찬 추악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의 터무니 없는 망상, 분리의식이 깨어지면서 세포가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다, 나는 한의과 대학을 다닌다, 나는 舍岩針法 공부하였다'라는

그런 相이 없는 사람만이 신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의 우리 의학이 좀더 영적인 상태로 개화하려면 깨닫는 의학, 신을 찾는 의학,

종교적인 의학으로 분명히 승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이말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육체를 어떻게 해보려는 싸움에 사로잡혀 버리면 첫번째의 방위선인 이성의 벽이 무너져

결국 육체 세포의 부조화라는 정보를 최후의 선고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달으면 치유작용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마음이 강하게 충전되어 완전하고도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신유이다" 

 

 

저는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주인공,

만약 여러분들의 육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째서 시체는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합니까?

그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옛날에 제 사부님께 어떤 사람이 와서

"요즘 스님들은 술만 먹고, 고기만 먹고 여자들만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 사부님께서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고?"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소문은 무엇으로 들었는가?"

"제 귀로 들었습니다"

"네 이놈! 귀로 들었냐?

죽은 시체는 귀가 있는데 어찌 듣지 못하느냐?

당장 꺼져라! 이놈!

어디다가 입을 함부로 놀리고..." 

 

바로 이와 같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시비만 일삼을 뿐이지요.

이것이 禪問答이 올시다.

죽은 시체도 귀가 있는데 어째서 듣지를 못할까요?

지금 제 말을 듣는 사람, 보는 사람, 생각하는 주인공이

이 우주의 영겁을 통하여 존재하여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깨달음의 근본의 자기 확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저나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여러분들이나 모두 똑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의존하고 또 무엇하러 공부를 하고, 또 무슨 주고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의존하고 권위자가 생기고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공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처럼 되어 보려고 하고 무언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 합니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유에 해당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단 몇 사람만이라도 깊은 이해가 있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병이 시작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기 존재의 진리

곧 참 나는 완전・무한・절대라는 자각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불건강이라는 의식이 마음을 지배하여 쾌활함과 생동감을 잃는 것이다.

그때까지 육체를 지탱해 오던 마음이, 병이 실제로 있다는 미망의 마력에 굴복하여 진리가 한 때 사라지는 것이다" 

 

 

성 안토니오의 질병관은 간단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질병도 없어 진다는 것이지요.

특히 이 점을 의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닌 한얼(大靈)의 종주권에 관한 지식을 부조화 혼란이라는 세력에 내어주고 마는 것이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약제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약제의 힘을 완전히 미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병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기라도 하면 완전히 미신하고 있었던 만큼 혼란은 더욱 커지고,

끝내 믿을 수 없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복하려고 온갖 약제에 매달리지요.

十全大補湯・雙和湯・諸味十八湯...

그러다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 내가 중병이 아닐까? 싶어서

한약도 써 보았다가 양약도 써 봤다가 X-ray도 찍어봤다가

빚을 얻어서 큰 병원에 입원도 해보고 여기 저기 검사를 다해 봅니다.

왜냐하면 불안하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쩌다가 화학적인 변화로 병이 좀 낫게 되면

그 약제가 나를 낫게 했다고 완전히 맹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나빠지면 '내가 나았었는데 왜 또 병에 걸렸을까?'하고

병의 상태가 나빠진 만큼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인데 그 실패로 인한 공포감, 좌절감 또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왔을 때 병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병에 대한 연상,

죽음을 죽음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가 문제라는 거지요. 

 

 

"육체는 화학작용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깊이 알아야 한다.

육체에는 지혜와 기능과 육체의 영위를 유지하는 놀라운 짜임새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곧 대생명의 활력이고,

그 대생명의 활력이 육체의 운동과 변화를 일으키는 바탕이다.

약초나 생약, 호메오파디(同種療法), 水治療法 등의 자연요법은 대개의 경우 세포에 작용하여 生化學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이 강력한 암시가 되어 그 암시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마음에 미치는 이런 작용이 결국 건강의식과 몸속의 균형 조화를 회복시키고 재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내재의 靈力의 법칙을 깨닫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다음에 오는 2차적 상태는 처음의 그것보다 더 나빠지기 일쑤이다. 

 

병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아뿐인 것이다.

'얼(靈)'은 병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이기심, 빼앗고 받기만 하는 마음, 탐욕, 미움, 적의, 인색, 완고, 난폭은 자아의 것이며 이것들이 거의 모든 병의 원인이다.

비인격적이며 치우침 없는 한 얼은 그런 부덕에 대하여는 아는 바 없다.

따라서 치우침 없고 비인격적인 것이 신유이다.

비인격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친절해진다.

왜냐 하면 사랑은 비인격적인 것이며, 사랑은 용서요, 치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이며 사랑은 무릇 반작용이 따르지 않는 완전한 작용의 바탕이다" 

 

 

우리는 보통 인격체가 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있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람인자 (人)옆에 아니불(弗)자를 쓴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 佛자 아닙니까?

사람이 아닌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리 분별을 초월한 세계를 이야기 한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공자에게 "일생동안 한 가지 글자를 일러주신다면 무엇을 일러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恕하는 일이다. 오로지 恕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너그러운 척 하면서 무엇이든지 '잘했다'라고 칭찬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딸이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나 오늘 남자친구 만났어"

"응, 그래! 그건 너의 자유니까..." 이건 용서가 아니죠.

"엄마! 나 그애하고 싸웠어"

"응, 그래! 그것도 잘했구나" 이것도 용서가 아니죠.

사랑도 아닙니다.

딸의 심리적인 진행 상황을 이해하고

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후배들의 정신적인 고통이나 학문적인 갈등을 함께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해 보셨습니까?

선배는 후배를 이용하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해 주는 척하는 관계 속에 운영되는 대학풍토에서는 신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이용하러 와서는 안됩니다.

오직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 받아 먹으려해서는 안됩니다.

저를 통째로 마시러 와야 됩니다.

뭔가 깨달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인가 풀어내 놓는 주인공에 핵심을 맞추지 못하고

제 말끝에만 끄달리면 여러분들은 제게 철저하게 속는 결과가 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陰陽 이전에 선악이 없는 마음, 시기 질투 없는 마음,

욕망이 없는 마음의 상태로 모든 사물을 관해서 보게될 때,

즉 그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여러분들이 곧 神農氏요, 黃帝요, 岐伯이요, 예수요, 석가요, 神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목은 잊어버리고 자꾸 자기 자신을 비열하게 낮추거나

또 터무니 없는 몇 가지 지식만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려 한다면

결국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옛날에 조주스님이란 분이 하루는 설법을 하러 올라가서 개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날 설법을 들으려는 대중이 250명 정도가 되었는데 조주 스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너무 대중의 수가 많았던 것이지요.

조주스님께서 개다리를 뜯고 있으니까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5명만 남았답니다.

그러자 '너희가 진짜 대중이다'하면서 설법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250명 가운데는 잘 자라는 싹마저 꺾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道의 익은 마음보다는 道人이 되어봐야 되겠다고 하는

즉 뭔가 되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거든요.

이러한 야심가는 언젠가는 자기 스승이고 친구고, 가족이고 간에 전부 다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舍岩針法을 개설하게 된 동기는 나를 내던질 사람과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러 온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놓은 사람들만이 모여서 지금 절망에 빠진 한의학을 고민해 보고

활로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연구해 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작은 라디오도 채널만 맞추면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데

여러분들이 이 우주에 무한히 떠다니는 念波, 텔레파시를 못잡는 이유는

여러분 스스로가 채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空心法',

즉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不二法',

둘이 아닌 법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남의 말에 끄달리게 되고,

의사가 되어가지고도 병을 치료하러 다른 의사에게 가는 것이거든요.

그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禪法의 근본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개체의 자아가 끊임없이 외적인 것과의 충돌과 갈등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았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인격적 內在眞我가 해방되어 대생명의 모든 힘이 방사되며,

그 자연의 힘의 전자파가 마음과 육체를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이 안에서의 원자 작용이 잠재의식층에 대해 암시를 준다.

그러면 잠재의식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서 반응이 일어나게 하여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 놓아

그 흐름이 향하는 곳에서 불순한 것을 밖으로 쓸어내고 혼란을 가라 앉힌다" 

 

 

厥陰病은 少陽으로 치료하고 少陽은 厥陰으로 낫게 한다고 제가 이야기 했다고 해서

병이 꼭 공식에 맞게 厥陰・少陽・太陰 이런 식으로 될까요?

옛날에 임제스님이

"밝은 것은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것으로 친다"하고 돌아다니는 奇僧에게 묻기를

"밝은것도 오지 않고 어두운 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묻자

"내일 저 위에 있는 대비원에서 제사가 있느니라"하고 휙 가더랍니다.

그제서야 임제 스님께서

"역시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구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厥陰으로도 오지 않고

少陽으로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경주에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그만둘 때,

저는 학생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는데 학생들이 받아들이질 않더군요.

학생들의 태도가 엉망이었습니다.

강의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 하는 말이

"선생님, 저희들 데모좀 해야 되겠습니다"

"무슨 데모인데?"

"아니 한의사가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양약사가 한약 제조하는 것에 대한 데모 아닙니까?"

이왕 시작하려면 강의 시작하기 전에 할 것이지

강의 시작한지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서 유인물을 휙 뿌리더군요.

그래 좋다.

데모도 남자다운 기개니까 얼마나 잘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으샤으샤하면서 조금 나가다가 시내에서 검은 차 하나 들어오니까 30분도 못돼서 밀려 들어오더군요.

"야! 오늘은 못하겠다. 내일하자" 그러면서 데모를 끝내더군요.

저는 한번 강의를 시작하면 4시간, 다섯시간 쉬지 않고 연속 강의를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가지고 내려갔는데

시꺼먼 차 하나 오니까 밀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속았다'라는 진한 배신감이 느껴왔습니다.

이런 대접 받고는 도저히 강의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모를 하려면 아예 예수나 석가처럼 하시오"하는 사행시 한번 읊어주고 강의를 끝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연민의 정이 있어서 혼란으로 지내온 여러분들이 안타깝고

정말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 풍토,

제 나름대로 지내온 13년 동안의 괴로움을 여러분은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일념에서

그것을 전해 주려고 했는데 그것을 그냥 잔소리 정도로 받아들이더군요.

그래서 그만두고 올라왔더니 이제는 아쉬워 가지고 "잘못했습니다. 강의를 해주십시오"하더군요. 

 

 

제가 그때 돈을 많이 번 종합병원의 원장으로서 자가용 굴리고 내려갔었더라면 아마 제게 그런 대접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강의시간이 되면 눈이 빠지게 기다렸겠죠.

매일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으로 대 여섯 시간 강의를 하고 생맥주 한잔 마시고 올라오니까

은연중에 가볍게 보아도 되겠다는 식으로 여겼던 거지요

지금은 학생들은 진실한 醫師觀, 진실한 眞理, 의사로서 정신을 진심으로 알려주려는 사람보다는

돈이 많고 권력 있는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따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그래서 저도 '광화문 네거리에 간판을 하나 내걸고 왕창 돈이나 벌어야 되겠다.

왕창 돈을 긁어모아서 부자가 된 다음에 그 다음에 강의를 한다고 하면 벌떼같이 올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에

5년 후에나 강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돈을 빌려 개업을 하고 비록 극소수의 학생일망정 올바르게 공부하려는 사람을 위주로 강연하기 위해서

禪室을 열어 두었는데, 제 나름의 신념에 1/100도 못 미치는 것을 느낄 때에는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자각적인 종교, 자각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학문을 재정립하려고 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黃帝內經" 한 페이지를 찢어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혼자 명상하는 사람이 태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을 여러분들의 후배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후배들에 대한 사랑, 후배들에 대한 교육을 외면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나는 내가 공부할 때 얼마를 투자했으니까 너희들도 돈 내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돈을 벌어서 아버지한테 돈을 갚으러 왔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기가 막혀서

"야, 이녀석아! 너는 이다음에 네 아들에게 돈 빌려주면 갚으라고 할래? 가져가거라"

우리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대학 6년 졸업하고 나서 개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대학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돈은 없고, 월급쟁이하러 제기동이나 종로에 나가 보세요.

어설픈 사람들 틈에 끼어서 "원장님, 담배라도 한 대 피우시고 다방에 가 계시죠.

제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슬슬 놀다가 오세요"

저녁때 다섯시쯤 돼서 들어가면 "원장님! 책상에 5,000원 놔뒀습니다. 가져가세요"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체계적인 학문없이 경험만으로 유지해 온 사람들도 십전대보탕, 쌍금탕, 쌍패탕에 무슨 약

무슨 약이 들어가는지 외우고 있는데 우리 한의사들이 외우질 못하는 사람도... 

 

 

지금 양의사들이 얼마나 권력을 잡고 있으면 한의사들이 군의관도 못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뼈저린 현실입니다.

'우리집은 시골에서 부자니까 내가 졸업하면 개업시켜 주겠지'

이렇게 나 하나만 생각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한의학 전체가 무너질지 모르는데 나 혼자만 생각해서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한의학의 전통이 무시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黃帝內經, 五運六氣法을 다른 사람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은 여러분들도 수없이 깨달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미래의 교육자로서 나서기에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듭니다.

나름대로 깨달은 뒤에 뼈저린 고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안일무사합니다.

'그냥 졸업만 하면 어떻게 되겠지'

여러분들 졸업하면 여러분들을 받아줄 만한 곳이 있는 줄 아십니까?

또 개업하려고 해도 여간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니고 또 연륜도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1년에 600명씩 쏟아져 나오게 되거든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칼날같이 무서운지는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나오면 잘 알게 될 겁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自覺의 힘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무엇인지, 陰陽 이전이 무엇인지, 한 생각 이전이 무엇인지

이런 영적인 깨달음 이외에는 우리 한방을 존속시킬 힘이 없습니다.

지금의 학문 체계에 도취되어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학교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 한의학의 장래는 암담할 뿐입니다.

젊고 뜻있는 여러분들이 이 한의학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 혼란이 가라앉는 것에 호응하여 '병'이라는 관념을 떨쳐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만 참된 평안이 확립되며, 그리하여 육체의 호소와 반란이 멎고 조화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앎으로써 조화가 회복되면 마음과 육체는 병의 성질이나 증상이 계속되어 기간 여하에 관계없이 변화한다.

진리에 따라 이끌어 줌으로써 병자는 고통이 한 때의 것이고 스스로 지어낸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환자들한테 "나만 믿으세요. 우리집 약만 믿으세요"

이런 식으로 맹신적인 차원보다는 병의 원인이 당신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무릇 나타나는 현상은 한때의 것이며, 한때의 것은 그저 끊임없이 유동하고

그 자체의 근거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의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지한 자아뿐이다.

실재는 이 무지한 자아와는 전혀 다른 것,

실재야말로 완전하고 비인격적인 참 나이다.

만약 병이 실재라면 그것은 고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공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뿜어내는 암시를 받아 공포 속으로 더욱 깊이 빠진다" 

 

 

의사가 공포를 느끼면서 환자에게 '不治입니다'라고 선고를 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 말한마디에 환자가 받는 암시는 대단한 것입니다. 

 

 

"죽음에의 공포가 인류라는 한 가족에 스며 있는 여러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공포를 떨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 살아있는 우주에는 단 한 분자라도 죽은 것은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주기 바란다.

대생명에게 죽은 부분 같은 것은 한 구석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지금 자네가 보듯이 생과 사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 속에서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겨감에 불과하다" 

 

 

생과 사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듣고 보고 느끼고 하는 그 주인공은 전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과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좋은 물건을 엉터리로 쓰고 있거든요.

'죽는다, 산다'하는 겁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명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들 내면 깊이 들어가 있는 공포를 한번 파고 들어가 보세요.

엄청난 긴장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질병의 공포, 종교가 주는 공포,

여자들 같으면 얼굴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포가 자리잡고 있지요.

이런 것들이 먼저 해결되기 전에는 의사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보다 완전한 집, 곧 靈體같은 보다 정밀한 몸 속에서 존재를 계속하면서

개체 생명의 의식이 차츰 확대 심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가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식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환자들은 이러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병이 왔지만 의사야말로

우리 인간의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죠.

이미 그전에도 있었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나게 수행을 많이한 사람일 겁니다.

옛날에 이르기를 "人身難得이요. 正法難得이라"

즉 사람 몸을 받기가 어렵고 정법을 얻어 듣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말을 툭 터놓고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의혹하고 근기가 높은 사람은 힘써 행해서

자기 근본을 찾으로 수행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이 되면 일당 백입니다.

혼자서 천명 만명을 당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의 구원을 호소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개화되세요.

사향냄새를 막으려고 아무리 겹겹으로 싸 놓아도 그 향기는 널리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익으면 자연히 냄새가 나서 벌이 꿀을 찾아 모여들듯이

불우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진리를 들으러 여러분에게 모여들 것입니다.

저는 이 사암침법을 빙자해서 '不分離性, 不二法, 無相對性'등

이런 정보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로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위로는 예수, 六祖, 부처님의 뜻이라고 나는 확고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한의학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를 이야기 하느냐?

그것은 여러분들 속에 내재해 있는 불교를 비판한다든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또 기독교가 선하다든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빨리 가져달라고 하는 것이올시다.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말입니다. 

 

 

"심신의 완전한 치유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소멸 되었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자네가 남을 도울 때는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가장 우둔한 마음일지라도 진리의 빛을 받은 의식은 그 속으로 침투할 수가 있는 법이다" 

 

 

여러분들이 남을 돕기 위해서

"內革・一心・歸源・饒益蒼生"이라는 명분론을 먼저 공부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이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사이기 이전에 전 중생계에 전부 필요한 말입니다. 

 

 

"眞言(만트라)은 공포에 찬 마음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괴로움이라는 관념을 도리어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하여 사람들은 대립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건강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관념과 싸우며 선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악이라는 관념과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은 끝이 없다" 

 

 

지금 이 말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성경이나 불경이 여러분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지

성경이나 불경을 여러분들이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깨닫고 보면 "黃帝內經"이 여러분을 증명시켜주는 것이지

內經을 여러분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神農氏가 가지고 있는 혀는 어떤 혀이며 岐伯의 눈은 어떤 눈입니까?

시력이 5.0이나 10.0정도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눈인데 그런 心眼이 있었을까요?

요컨대 우리 마음에 있는 시기, 질투, 공포, 분리의식 등 이런 것을 떨어버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떠들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갈을 치우기 전에 씨를 뿌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지금 舍岩針法을 공부해서 어떤 소득이 있었다거나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잊어버리시고

'깨달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은 사람들이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멍한 눈, 얼빠진 표정, 혹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난 모르겠노라는 식이예요.

강좌에서도 이전에는 문제하나 던져 놓으면 여기 저기서'혹시 이것 아닙니까?' 하면서 질문도 많았는데

요즘에는 어찌 그리 무관심한 얼굴의 사람들 뿐인지 모르겠어요.

이건 마치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똑같은 느낌입니다.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저희 엄마가 이빨이 아픈데 어디로 모셔올까요?"

또 "제가 허리가 아픈지 얼마가 됐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靈적인 이야기 해주고 또 肉的인 문제까지 다 치료해 주고

그러면 아예 保任까지 다 해서 보내드릴까요? 

 

"제가 公安을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제 의견에 선생님 뜻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이 없더군요.

제 친구가 어느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야, 이친구야! 지금 이 禪室에 앉아서 강의 듣고 있는 이 학생들이 진짜 중병 환자야,

이 사람들은 지금 환자를 치료할 사람들인데 바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더 급해"

"허긴 이 친구들이 나중에 내 고향에 가서 개업할지 모르니까..."라고 하더군요.

문앞에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오히려 우선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저와 일대일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번 소견을 잘못 먹으면

천명, 만명, 수십만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이중에는 나중에 강단에 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교수로 나갈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교수가 깨어있지 못하고 몇 가지 외운 지식으로 남의 말만 인용을 한다면

밑도 끝도 없고 제자도 지루해지고 선생도 지루해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똑똑한 제자가 나타나면 업수이 여기려고나 하고

또 쓸데없는 자만심을 넣어줘서 안하무인격이 되어 버리죠.

이런 것은 道家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깨달은 의식의 슬기로운 말의 방편을 쓰면 환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협력하게 되며,

그리하여 변화가 순간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實在・實相의 眞理가 전자력의 파동을 발생시키고,

그 파동이 환자의 마음에 도달하면 그때까지 그를 얽어매고 있던 소극적인 정신상태가 타파되고 만다.

이런 방법으로 가까운 곳에서든 먼 곳에서든 환자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순간에 마음은 치유되었던 것이다.

'딸아, 마음을 밝게 가져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느니라'는 말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

자네들은 이런 말들을 늘 듣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말로 그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의 믿음이 낫게 했느니라"라는 말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진리를 알 때 '오오라'가 맑아지며 상념이 강력해진다" 

 

 

'오오라'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의학에서도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련에서는 이 오오라를 X-ray로 투시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었거든요.

그래서 몇 가지 광명의 색깔로 구분해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육체적인 질병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며 진단법에 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靈眼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오라가 눈에 띤다고 합니다. 

 

 

"그때 대자연 속의 그 어떤 것도 그를 해치지 않게 되며,

그 또한 자연 속의 어떤 것에도 해를 미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네가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자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배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네는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힘과 주권을 이미 부여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반대관념인 공포를 거쳐서가 아니라,

깨달음 곧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참 믿음을 세우라.

공포에서 나오는 것은 믿음이라는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도리어 관념의 대립을 격화시켜 사람을 더더욱 대립 속에 갇히게 할 뿐이다.

기꺼이 귀 기울여 잘 듣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마음에 스스로 지워 놓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은 병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의 '참 나'가 병이나 죽음, 선이나 악, 실패나 성공으로 어떤 영향도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인격적 내지 인간적인 것을 넘어,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고요히 봄으로써 비인격적, 초인간적인 자네가 되어야 한다" 

 

 

고요히 관조하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 하는군요. 

 

 

"觀心하라, 고요히 네 마음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체의 의식까지도...

네가 어떤 말이 나오려 할 때에 좀 더 깨닫고 쉬어라.

왜냐 하면 말은 곧 생각이기 때문에...

자네는 병자가 치유를 경험해 주기 전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은 병자의 치유를 경험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의사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제가 하는 이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질병에 대한 이론보다는 깨달음 위주로 直觀위주로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깨달음이 없으면 학교에서는 교수에게 속고, 저에게 오면 저한테 속고,

대가에게 속고, 권위자에게 속고, 도인에게 속고, 말에 속고, 경전에 속고

이렇게 속고 속다가 일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이 책 다음 부분에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뜻이 등장을 하는데

식물이 어째서 우리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식물이 갖고 있는 靈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식물이나 광물이나 또 우리가 일으키는 감정적인 차원을

옛 성인들이나 지금의 깨달은 사람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에 있는 커텐이나 사물들도 내 생각, 내 상념이 물질화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물며 식물이 그렇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식물도 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불확실하게 이야기 한 것은 '그렇다'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 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깊숙한 진리의 차원을 이야기 하면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념은

털끝만큼도 더하고 덜한 것이 없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인 현상 중에 미세한 것은 마음이요,

거친 것은 육체요, 물질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시려면 "히말라야를 넘어서"를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유심적인 五運六氣'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논문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한의학에 종교와 公案을 접목하는 작태'라는 등 많은 혹평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 친구는 五運六氣派야'저도 이런 소리를 다 듣고 있습니다.

정말 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제가 왜, 오죽하면 종교를 집어넣었겠습니까?

한의학을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실패를 하고 워낙 힘이 드니까 명상법, 관심법을 통해서 도전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한때는 충분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성질이 끈기가 부족하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걸 끝까지 지속시키지 못하고 겨우 3%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도 '이 정도 40일 동안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솔직히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쉽게 하는 한 마디를 얻기 위해서 6개월, 1년, 2년씩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워듣기 위해서 전국을 헤매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제게 어떤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심리적인 이득이나 공경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하나의 살풀이 장소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와는 어떤 거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의 자발적인 참여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마음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淸虛歌 

 

그대는 거문고 안고 큰 소나무를 의지하나니(君抱琴兮依長松) 

 

큰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요(長松兮不改心) 

 

나는 길게 노래하며 푸른 물가에 앉나니(我長歌兮坐綠水) 

 

푸른 물은 맑고 빈 마음이다.(綠水兮淸虛心) 

 

마음이여 마음이여(心兮心兮) 

 

나와 다만 그대로다(我與君兮) 

 

 

이제부터는 중반전에 접어들었는데 중반전 이후는 일종의 전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말을 들으면서 명상의 경지로 몰입해 보려는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름대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또 거부되는 것은 왜 거부가 되는지

그래서 다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또 틀리는 것은 수정해 나가는 그런 분위기가 주어져야 합니다.

출처 :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정심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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