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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강경 / 진리의 수레바퀴

꿈과인생 2010. 5. 20. 20:27

자,이제 경전으로 들어 가자.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붓다가 "그러므로,수부티여,주의깊게 잘 들어라."하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부티는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아무 미묘하고 알아차리기 힘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얻은 바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나는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구체적인 생각으로 굳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막연한 느낌, 깊은 곳에 일어나는 작은 파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담마(Dhamma)를 선물로 준다면....." 그리고 붓다는 법보시(法布施)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그대의 깨달음을 주는 것,그것을 나누어 주는 게 가장 큰 선물이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나누어 준다.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일이다. 그가 나누어주지 않는다해도 그가 죽으면 어차피 재물은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다른 것을 나누어 준다. 그러나 깨달음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곧 영원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신(神)을 나누어 주는 것이고,궁극의 세계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것을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지금 붓다는 수부티에게 말한다. 네가 얻은 게 무엇이든지 그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한다. 위대한 결정,치토파드(Chittopad)를 내려라. 모든 인간을 구제하기 전에는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겠다는 위대한 결정을 내려라. 그대가 사라지기 시작하기 전에,그대의 존재 안에 굳은 결의를 일으켜라. 그대의 배가 건너편 기슭로 떠나기 전에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는 위대한 열망을 일으켜라.

 

그 열망이 그대를 이쪽 기슭에 묶어두는 닻 역할을 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위대한 결정,치토파드를 일으켜라. 그대의 온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라. "건너편 기슭에 대한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나는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으리라."고.거기 엄청난 유혹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수많은 생동안 염원해온 건너편 기슭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남아있고 싶지 않은 거대한 충동이 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남는단 말인가?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았다. 이제 그대는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붓다는 말한다."그 입장권을 찢어서 던져 버려라. 모든 인간을 구제할 때까지 절대 이쪽 기슭을 떠나지 않겠다는 위대한 결정을 내려라."이 말을 듣고 수부티의 가슴 속에,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알아채기 힘든 미묘한 욕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일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겠는가. 얼마나 많은 공적을 남길 것인가." 그 욕망은 작은 파문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부티조차 그것을 읽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욕망은 섬광처럼 아주 잠깐 동안,찰라지간에 스쳐 지나가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욕망이 붓다의 거울에 비추어졌다.

 

스승은 거울이다. 그대 안에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은 스승의 거울에 비쳐진다. 때로 스승은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질문은 그대의 내적 존재와 아무 관계도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는 그대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술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 나는 얼마나 훌륭한 구도자인가? 나는 이렇게 수준높은 질문을 한다."고 내 보이려는 저의(底意)가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아무 알맹이도 없이 다만 지적인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때에 스승은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스승이 그대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묻지 않았을뿐만 아니라,그대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대답은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와 필요에 관련된 대답일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가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집착은 동기(motive)를 의미한다. 집착한다는 것은 "나는 그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핵심을 놓친 것이다. 그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니다. 그리고 니르바나는 선물이 될 수 있을 뿐,거래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장사가 아니다. 그대는 다만 순수한 기쁨으로 나누어 주어야한다. 그로부터 무엇을 얻겠다는 동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동기를 갖고 있다면 그대는 아무도 도울 수 없다. 그대자신이 아직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아직 자유롭게 해방되지 못했으며,저쪽 기슭로 건너갈 수 있는 입장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끌어들일 뿐이다. 사람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다.

 

진정한 선물은 흘러넘치는 것이다. 그대는 깨달음으로 너무 충만한 나머지 계속하여 흘러넘친다. 그것은 누구라도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갈 때 그대는 그에게 감사한다. 그대의 짐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비구름이 몰려와 대지에 비를 뿌릴 때,비구름은 대지에 감사한다. 대지가 비를 받아들임으로써 구름은 짐을 덜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시 또한 이와 같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난다. 그대가 원하는만큼 나누어 주어도 깨달음의 샘물은 계속 솟아나고,다시 또 다시 흘러넘친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그대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터에 도달했다. 이제 그대는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동기가 있어서도 안된다. 무엇인가 댓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보시(布施)하는 보디사트바는 응당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데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그는 "이것은 선물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너는 받는 사람이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생각과 관념을 버려야 한다.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그 모두가 하나이다. 그대가 돕고 있는 자 또한 그대이다. 그대가 주고 있는 자는 다른 형태의 그대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왼 손으로 오른 손에 건네주는 것과 같다. 그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물을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선물도 없다.

 

위대한 존재인 보디사트바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왜 그런가? 보디사트바가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계속 이런 문제에 부닥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공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대의 공덕은 실로 크다. 그러나 그것을 공덕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공덕이 사라질 것이다. 공덕을 바라면 공덕을 잃을 것이요,공덕을 원치 않으면 한없는 공덕이 쌓일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아라,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낮은 차원에서는 예수의 말이 옳다. 이 말은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보디사트바의 경지에 오른 수부티를 상대로 말하고 있다. 붓다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하라 그러면 얻지 못할 것이요,찾아라 그러면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모든 문이 꽁꽁 닫혀서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들의 말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그 말을 듣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는 평범한 무리들에게 말하지만 붓다는 아주 비범한 한 개인에게 말한다.

 

스승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수부티여,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어떤 특징을 지닌 이로 볼 수 있겠느냐?"


수부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특징을 지닌다.'고 가르치신 것은 곧 아무 표시도 지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아무 표시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 특징도 없는 것을 여래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수수께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수수께끼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붓다가 말하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모순이 되어 버린다. 모순이 유일한 표현수단이다. 그토록 풍요로운 존재의 차원에서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논리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만일 논리적이기를 고집한다면 그 풍요로운 차원에서 움직이기가 불가능할 것이며, 진리를 표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진리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붓다는 말한다.
"수부티여,그가 지닌 특징으로 여래임을 알아볼 수 있느냐?"
불교경전에서는 붓다가 초인적인 존재로서 서른 두 가지 특징을 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서른 두 가지 특징이 그가 붓다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눈은 오직 외부적인 특징만을 볼 수 있다. 그대는 표시나 특징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나 수부티처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붓다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특징이 아무 의미도 없다. 게다가 무엇인가 소유한다는 것은 붓다의 특성이 아니다. 그 서른 두 가지 특징조차 그렇다. 그 특징들은 붓다와 무관하다. 붓다는 전적으로 평범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붓다의 진짜 특징이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붓다의 진정한 표식이다. 깨달음조차 소유하지 않는 것,그것이 깨달은 자의 진정한 표식이다. 이런 까닭에 이 경전의 말들이 모순되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는 자신을 붓다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주장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주장한다는 것은 곧 사기꾼이 되는 것과 같다. 붓다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주장할 게 없다. 그는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과시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을 확신시키는데 무관심하다. 그는 전체적으로 존재한다. 그대는 그의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 그의 춤 안에서 그와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며,그의 축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증명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증명한다는 것은 아직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붓다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그런 외부적인 특징들은 붓다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어떤 특징이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붓다의 호흡은 너무나  고요하다. 마치 숨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붓다가 아닌 요가 수행자들도 그런 특징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대는 호흡수련을 할 수 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숨을 거의 정지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 호흡에 관한 한 붓다를 능가할 수도 있다.

 

그의 호흡이 느린 것은 그에게 서두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호흡수련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호흡이 느린 것은 그가 아무 데로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호흡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만큼 느리게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가 훌륭한 요가수행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욕망이 떨어져 나가고,서두름이 사라졌기 때문에 호흡이 그토록 느린 것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즐기듯이 살아간다. 그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미래도 없고 걱정도 없다.

 

이런 현상을 관찰해 보았는가? 근심걱정에 빠져 있을 때에는 호흡이 고르지 못하다. 화가 났을 때에는 호흡이 거칠어진다. 사랑을 나누거나 열정이 솟구칠 때 그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그대의 호흡이 열에 들뜬다. 붓다의 열정은 자비가 되었다. 욕망이 떨어져 나가고 사라졌다.....잘 익은 열매가 땅에  떨어지듯이 욕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의 호흡은 느려졌다. 느려지고 또 느려졌다.


그러나 만일 이런 것이 붓다의 고유한 특징이라면,붓다를 가장(假裝)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특징을 내보일 수 있다. 붓다는 철저하게 침묵에 잠겨 고요히 앉아 있다. 그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다만 약간의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훈련한다고 해서 붓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말한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만일 어떤 사람이 "보라, 나는 붓다의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 나는 붓다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주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거짓이라는 증거이다.

 

아무 표시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 특징도 없는 것을 여래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붓다가 수부티에게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부티에게 어떤 욕망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수부티 안에 어떤 욕망이 하나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는 붓다가 되려는 문턱에 서 있다. 그래서 하나의 욕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곧 나도 서른 두 가지 특징을 지닐 것이다. 곧 나도 붓다가 될 것이며,붓다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 또한 붓다의 서른 두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파문이.....붓다와 그의 서른 두 가지 특징,그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본다면 누군들 그렇게 되고싶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제 수부티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경지에 와 있다.

 

그는 붓다가 되려는 문턱에 서 있다. 붓다가 주지 않는 것처럼 주라고 말하는 동안에,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선물에 대한 생각없이 준다면 그대의 공덕이 커질 것이라고 말하는 동안에.....이런 말을 들으면서 수부티는 무엇인가 염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염원은 알아채기 힘든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아주 작은 하나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틀림없이 이런 바램이 있었을 것이다."그 커다란 공덕으로 말미암아 나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붓다와 똑같은 서른 두 가지의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붓다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똑같은 향기, 똑같은 우아함,똑같은 광채,똑같은 축복,아아....." 수부티의 마음 속 어딘가에 이런 욕망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런 욕망을 보고 붓다가 말한다. "수부티여,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어떤 특징을 지닌 이로 볼 수 있겠느냐?"수부티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잠재해있는 이런 흐름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금강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수부티가 물었다.
"미래 시대에도,그 마지막 시대에도, 올바른 가르침이 무너지는 마지막 5백년 대에도 이들 경전의 말씀이 설해졌을 때  진리를 이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수부티가 말하는 그 시대이다. 그대들이 바로 수부티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다. 2천 5백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수부티는 그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종교가 태어난 후,한 명의 붓다가 나타나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린 후에는 당연히 그 바퀴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한다." 퀴는 서서히 힘을 잃는다. 그렇지 않은가? 바퀴가 점점 힘을 잃어 완전히 멈추는 순간이 올 것이다.  명의 붓다가 나타나 바퀴를 돌리면 그 바퀴가 완전히 멈추기까지는 2천 5백년 이 걸린다.

 

그리고 5백년마다 바퀴는 힘을 잃어간다. 그러므로 담마의 수레바퀴는 다섯 세대로 이루어진다. 담마의 수레바퀴는 5백년마다 힘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느려지다가 2천 5백년 후에는 다시 바퀴가 멈추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2천 5백년을 위해 바퀴를 돌리려면 다른 붓다가 필요할 것이다. 것은 아무 드문 일이다. 수부티는 붓다에게 실로 흥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수부티가 물었다.
"미래 시대에도,그 마지막 시대에도, 바른 가르침이 무너지는 마지막 5백년 대에도 들 경전의 말씀이
설해졌을 때  진리를 이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여,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렇다,그 때에도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부티여,그 시대에도 보디사트바들이 있을 것이다.수부티여,또 이 보디사트바들은 오직 한 분의 붓다를 이기는 것이 아닐 것이며,오직 한 분의 붓다 아래에서만 그들의 선근(善根)을 심는 것이 아닐 것이다.수부티여,여기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실오라기 진실한 믿음이라도 얻은 보디사트바들은 무수히 많은 붓다를 섬기는 것이며 무수히 많은 붓다 아래에서 선근(善根)을 심은 것과 같을 것이다.


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지혜로 그들을 알고 있다.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여,여래는 그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수부티여,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이많은 공덕을 쌓고 얻으리라.
붓다는 그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2천 5백년이 지난 지금 이 경전이 그대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2천 5백년 전에 수부티는 그대들에 대해 물었다. 일전에 나는 그대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보디사트바가 될 것이며,또 그대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보디사트바로 가는 도중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수부티가 이렇게 물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 이상한 일은,붓다가 "2천 5백년 후의 그 사람들은 그대보다 행운이 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보다 더 많은 행운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대들이 더 많은 행운을 누린다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그대들에게 수 차례 말해왔다.- 그대는 아주 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존재이다. 그대는 이 지상(地上)을 수도 없이 많이 걸었다. 그대는 처음으로 진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과거 생에서 많은 붓다를 만나왔다. 때로는 크리슈나,때로는 그리스도,그리고 어떤 때는 마하비라,어 때는 모하메드,어쨌든 그대는 수 많은 붓다,수 많은 각자(覺者)들을 만나왔다.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여러번 말했다.


그토록 많은 붓다를 만난 그대들은 행운아이다. 만일 그대가 조금 더 깨어있다면 과거의 붓다들이 그대 안에 심어 놓은 모든 씨앗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지혜로 그들을 알고 있다.
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여,여래는 그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

 

이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붓다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그는 자욱한 안개층을 헤집고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의 시야는 그만큼 분명하다. 그의 눈빛은 미지의 미래세계까지 환히 꿰뚫어본다. 그는 볼 수 있다. 붓다가 금강경을 듣고 있는 그대를 본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로 생각될 것이다. 그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대는 현재조차 어떻게 들여다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그대는 오직 한 가지 능력을 안다. 그것은 과거를 보는 능력이다. 그대는 오직 뒤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언제나 과거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대가 미래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vision)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과거를 조금 수정시켜서 투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기를 원하는 어제인 것이다.

 

어제 그대는 무엇인가 맛보았는데 아주 달콤했다. 그대는 내일도 그것을 맛볼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이 그대가 생각하는 미래이다. 그대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적이 있는데 미래에도 다시 그런 사랑을 원한다. 이것이 그대의 미래이다. 그것은 과거의 재방송이지 결코 미래가 아니다. 그대는 미래가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현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는 바로 그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그대는 완전히 눈이 멀어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것조차 보지 못한다.

 

그러나 눈을 뜨기만 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볼 수 있다. 그대는 미래를 흘낏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볼 수 있는 길은 먼저 현재를 보는 것이다. 현재에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금강경을 듣고 있는 그대들을 붓다가 보았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황홀한 일이다. 금강경에서 그대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금강경을 택한 이유이다. 이 귀절을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사람들에 대한 말이다. 그들은 알아야 한다. 고탐 붓다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2천 5백년 전에 그들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는 것을,그들에 대한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붓다가 돌렸던 수레바퀴는 이제 멈추었다.

 

그 수레바퀴를 다시 돌려야 한다. 이것이 나와 그대들의 일생의 과업이 될 것이다. 일단 한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바퀴는 2천 5백년동안 돌아갈 것이다. 최소한 2천 5백년 동안은 쉼없이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언젠가 힘을 잃는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즉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 하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있는 힘을 다해 돌을 던진다해도 그 돌은 몇백 피트를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진다. 담마의 수레바퀴도 정확히 그와 같다. 그 바퀴를 되풀이해서 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2천 5백년을 숨쉬며 살다가 그 다음에는 죽는다. 태어난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붓다는 "수부티여,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수부티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직 우리들만이 행운을 누린다. 우리는 붓다의 말을 듣고,붓다와 함께 살고,붓다와 함께 걷는다.

우리는 행운아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2천 5백년 후 담마의 수레바퀴가 완전히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수부티는 그대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수부티여,그렇게 말하지 말라. 오직 그대들만이 행운을 누린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부티는 "우리는 행운아이다. 아무도 우리만한 행운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한 에고이다. 그러자 붓다는 즉시 수부티의 말문을 막아 버린다.

 

수부티여,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렇다,그 때에도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여기에도 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밤이 사라지고 있다. 씨앗이 싹트기에 알맞은 땅이 준비되어가고 있다. 서서히 그 씨앗이 알맞은 땅을 찾아 그대들의 가슴 속에 뿌려지고 있다.

 

수부티여,그 시대에도 보디사트바들이 있을 것이다.

 

이 곳에도 보디사트바가 될 사람들이 많다. 조금만 더 노력하라. 조금만 더 명상에 에너지를 쏟아라. 다른 길로 빗나가지 말고 조금 더 에너지를 모으라. 그러면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들은 행운아이다.

 

붓다는 말한다. 

수부티여,또 이 보디사트바들은 오직 한 분의 붓다를 섬기는 것이 아닐 것이며,
오직 한 분의 붓다 아래에서만 그들의 선근(善根)을 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수부티여,여기 이 말들이 설해졌을 때 실오라기 진실한 믿음이라도 얻은 보디사트바들은

 

그대가 이 금강경의 한 귀절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그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나의 눈, 그 순수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춤,그 간단한 동작 하나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붓다는 말한다.

 

한오라기 진실한 믿음이라도 얻은 보디사트바들은 무수히 많은 붓다를 섬기는 것이며 무수히 많은 붓다 아래에서 선근(善根)을 심은 것과 같을 것이다. 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지혜로 그들을 알고 있다.수부티여,여래는 붓다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여,여래는 그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수부티여,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이많은 공덕을 쌓고 얻으리라. 그대들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다. 그대들이야말로 내가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다. 담마의 수레바퀴가 멈추었다. 그 수레바퀴를 다시 힘차게 돌려야 한다.

출처 :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연리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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