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최고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사서. 그 중에서도 특히 읽기만 해도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大學의 주요 내용은
三綱領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과, 八條目(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삼강령은 차후에 인연이 닿는 다면 언급키로 하고, 오늘은 팔조목 첫번째와 두번째 조목인 格物과 致知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격물과 치지 외 나머지 여섯 조목에 대해서는 "대학"에 해설이 나와 있지만, '격물' '치지'의 두 조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없다.
그래서 宋代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나와 유교 사상내 중요한 논쟁의 표적이 돼 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송나라 朱子의 설과 明나라 王陽明의 설을 들을 수 있다.
*** 주자의 설 : 萬物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理)'를 갖추고 있다. '이'를 하나하나 窮究해 나가면 어느 땐가는 豁然히 만물의 겉과 속, 그리고 세밀함과 거침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 왕양명의 설 : 格物의 '물'이란 事다. '사'란 어버이를 섬긴다던가 임금을 섬긴다던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 곧 뜻이 있는 곳을 말한다. '사'라고 한 이상에는 거기에 마음이 있고, 마음밖에는 '물'도 없고 '이'도 없다. 그러므로 격물의 '격'이란 '바로잡는다'라고 읽어야 하며 '사'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격물'이다.
악을 떠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良知를 명확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知를 이루는致며 '치지'이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 대해 탁견으로 정평이 나 있는 주자와 왕양명의 해설을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격물치지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한다는게 쉽지만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국어사전에 간단하게 나와 있는 격물치지에 대한 풀이가 더 간단-명료해서 이해하기 쉬운면이 있다.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 이 바로 국어사전류에서 보여지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실제 사물을 마주하여 그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것보다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수승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격물치지를 대학 팔조목의 첫번째와 두번째 조목으로 정한 고인의 속내와는 왠지 이격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격물치지의 적실한 본 뜻은 무엇인가?
주자나 왕양명의 학설처럼 복잡할 것도 없고, 국어사전류의 풀이처럼 뭔가 좋은 말이긴 한데 생명력 잃은 사구나브랭이는 결코 아닐 것이다.
격물치지란 말의 본 뜻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대개가 格物致知란 말을 풀이함에 있어 格은 이를 격, 物 은 만물 물, 致는 이를 치, 知는 알 지로 생각하고 이리저리 견강부회하며 꿰어 맞추기 식의 풀이를 하기 때문에 그 간단하고 명료한 본 뜻이 줄곧 희석되고 있다.
格은 이를 격, 격식격, 感通할 격, 다툴격 등으로 쓰이는데, 격물치지에서는 감통할 격으로 쓰였음을 알아야 한다.
즉, 物에 格해서 앎에 이른다는 뜻이 바로 고인의 의지다. 물에 격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사물의 접하여 그 이치를 연구함으로써 탁상공론의 관념적 희론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에 격한다는 것은 사물을 대상으로서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감응하여 통함으로써 궁리와 분석의 대상이던 물과의 거리가 사라지고 온전히 하나됨으로써 진정한 앎에 이름을 말한다. 격물로 물아일체가 되면, 당연히 내외명철의 치지가 됨은 당연하다.
타심통도 마찬가지다.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요리조리 골똘히 생각하거나, 뭔가 특별한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을 타심통이라 하지 않는다. "나"가 없음으로써 상대와 둘 아니게 되는 것, 마치 유마거사가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한 것을 이름하여 타심통라 하는 것이다.
격물이 된다면 매일 아침 출근길에 무덤덤히 지나쳤던 집앞 은행나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리 없으며, 무한경쟁 구도속에서 형식적이고 계산적 관계였던 직장동료의 아픈 가슴에 어찌 냉담하기만 한체 코끗이 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격물이 돼야 비로소 한 작은 티끌속에 시방세계가 머금어져 있음을, 만체가 동근임을, 만법이 귀일된 본원의 소식에 귀가 열리지 않을까?
우리 중생들은 내 부모와, 내 처자식과는 제법 감통하며 살고 있다. 내 집과 내 차등 내것들에 대해서도,,, 그러나 공부인이라면 원근친소를 넘어 인연 닿는 주변의 모든 사람, 모든 것들에 대해 매 순간 순간 격물치지 할 수 있어야 한다. 격물치지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선업을 짓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감통해야만 진정한 자비를 베품없이 베풀며 비로소 세상을 가슴 가득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