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대학의 첫 대목으로, 명명덕과 재친민과 지어지선을 3강령이라고 한다.
대학이라고 한 연유는 무엇 무엇과 비교해서 크다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크고 작음을 모두 포함한 절대적 개념으로써 크다는 의미다. 마치 반야심경의 첫 귀절인 마하반야밀이라고 할때의 마하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道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강령이 在明明德이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는 말이다.
어두운 덕을 애서 밝히는게 아니라 이미 밝은 덕을 다시 밝히는 것이다. 불교의 견성과 다르지 않다. 한번도 어둠에 물들지 않은 소소영영한 자성불을 등기이전하라는 말이다.
두번째 강령이 在親民이다.
대학의 도는 백성과 친해지는데 있다는 말이다.
정자가 親은 마땅히 新으로 새겨야 한다는 망령된 주장을 펼친 이후에 대부분의 유자들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다고 풀이하고 있는 귀절이다. 얼핏 생각하면 명덕을 밝힌 유자가 백성들을 새롭게 교화시킴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참으로 명덕을 밝힌 공부인이라면, 백성과 별개인 존재로서 주객으로 나뉘어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친해지고 친해져 둘 아니게 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명명덕이란 상구보리를, 재친민이란 하화중생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대목에서 간과해선 안되는 것은, 상구보리란 위로 따로이 구할 보리가 없음 요달하는 것이고, 하화중생이란 아래로 따로이 교화할 중생이 없음을 요달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고인께서는 백성을 새롭게 하고 다스리는 차원의 신(新)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백성과 온전히 하나되는 차원의 친(親)이란 글자를 선택해 쓰신 것일 뿐인데, 정자의 망언에 현혹돼 굳이 친을 신이라 바꿀 까닭은 전혀 없다.
세번째 강령은 止於至善이다.
대학의 도는 지극한 선에 머무는데 있다는 말이다.
지선이란 것은 지극하고 지극하여 그 착함 마저 다한 것으로 지선에 머문다는 것으로 삼법인중 하나인 열반적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결국 모두가 무심으로 녹아들어 하나가 된 대동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천국이 지금 여기에 우뚝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