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口碑傳統과 李朝後期 漢詩의 變貌

꿈과인생 2012. 9. 18. 15:12

口碑傳統과 李朝後期 漢詩의 變貌*

진 재 교**

 

차  례

 

 

 

1. 머리말

2. 口碑의 擴散과 漢詩의 口碑受容 樣相

3. 口碑受容과 形象化 方式

4. 맺음말

1. 머리말

苦苦苦        괴롭고 괴롭고 괴로워라

機上苦        베틀에서도 괴롭고

田中苦        밭에서도 괴롭고

廚下苦        부엌에서도 괴로우니

十二時        하루 열두 때

何時不苦1)    어느 땐들 괴롭지 않으리요


玄同 李安中(1752~1791)의 시이다. 작품은 3言 6行의 樂府詩로, 마치 화자가 누구를 향해 독백하거나 자탄하는 노래가락과 흡사하다. 이 작품처럼 여성화자가 자신의 고달픈 삶을 읊조리는 사설은 ‘婦謠․시집살이謠’2)의 어느 장면을 연상시키는 바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성화자의 시점이라든가 내적인 운율성, 또한 내용에서 民謠의 체취가 물씬 풍기며, 전체적으로 ‘婦謠’의 어느 부분을 축약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서 일반 한시가 지닌 절제되고 정형화된 均齊美라든가, 詩語의 조탁된 品格美는 해당사항이 없게 된다. 그리고 시가 담고있는 정서나 한시의 작법에서도 ‘玉臺香奩體’의 그것과 일정하게 차이가 난다. 시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苦’라는 同一字로 押韻하고 있는 점, 詩語의 직조방식의 평이성, 句를 措置하는 자유스러움 등과 같은 것은, 어찌 보면 거의 파격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작품과 같은 民謠趣向 漢詩3)는 구비의 전통과, 民의 情緖에 대한 재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민족문학사의 전개과정에서 漢詩와 口碑와의 관련성은 그다지 긴밀한 편이 아니었다. 영웅서사시 <東明王篇>이라던가 고려말의 ‘小樂府’, 그리고 樂府詩와 같은 행복한 만남의 예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한시와 구비문학은 만남보다는 이별한 채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漢詩에서 口碑傳統을 발견한다거나, 또한 그러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사실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러한 만남이 다양하고 대량적으로 나타난다면, 문학사로도 주요할 만한 사안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앞시기에 간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조후기에 이르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구비문학과 한시가 빈번하게 만나고, 한시 또한 구비물을 수용하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새로이 갱신하기도 한다. 이 점이 문학사의 새로운 地形圖 구축에 신선한 충격을 제공하는 바 있다.

하지만 한시가 구비물과 접촉하거나 수용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한 편이다. 민요는 말할 것도 없고 구전되던 이야기가 한시로 들어오거나, 하층에서 노래되던 타령조 가락이나 사설이 들어오기도 한다. 대체로 이 경우, 구비전통은 한시의 양식 내지 형상화 방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촉구하는 動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고는 민요, 민담, 설화 등 다양한 층위를 지닌 구비전통이 한시와 어떻게 만나고, 그러한 만남의 결과, 한시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했던가 하는 점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4) 사실 이 점이 이조후기 문학사의 역동성을 드러내 주는 징표로 볼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양식의 교섭과 변모 또한 문학사의 또다른 읽기라는 면에서 일정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것5)이 아닌가 한다.   

2. 口碑의 擴散과 漢詩의 口碑受容 樣相

17세기 동아시아는 국제질서의 재편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임진․병자 양전쟁을 기점으로, 明은 淸으로, 日本은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이조는 사회체재가 근저에서부터 흔들리는 등, 새로운 질서의 구축과 함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이조의 경우, 前代未聞의 전쟁을 겪고 난 직후로, 엄청난 후유증은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한 체재 모순에 직면하였다. 당시 이조를 중심 축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이 진행하던 형국이었다. 그리하여 상층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하층민 또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체험을 하게되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경험의 확대는 곧 다양한 체험담을 산생시킨 바 있었거니와, 곧 다양한 체험담은 다계층의 사람들에게 적층화되면서, 횡적 종적으로 결합되면서 다종다양의 구비물로 퍼져나간 것이 17세기 이후의 문학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이후 서사양식 발전의 주요한 외적인 토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뿐 아니라, 이 구비물은 횡적 종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구연자를 만나 구연되기도 하고, 다양한 양식에 기록으로 정착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散文樣式이 변모되기도 하고, 野談이 발전하고, 한편으로는 漢文短篇이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조후기에 立傳의 대상 인물에 하층민이 대거 수용되는 저간의 사정도, 이러한 民의 얼굴이 뚜렷하게 성장한 결과이지만, 어찌 보면 구비물이 확대된 결과이기도 하다. 漢詩와 口碑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口碑의 확산이 漢詩의 자장 안에 접속되면서 다른 서사양식과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는 바 있었다.

민간의 歌謠 또한 같은 경로를 밟는 바 있었다. 체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민이 겪는 삶의 갈등과 애환은 구비형태로 다양하게 표출되기도 하는데, 민요나 타령과 같은 歌唱이 그것이다. 이같은 口碑歌謠의 확산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시조의 대량창작과 歌集의 집중적 출현이다. 당시 시조는 여러 계층에 의해 가창되었기 때문에 일부 시조는 더러 民謠化되기도 하였다. 이는 당대 시조를 한시로 재창작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 때, 漢詩化의 대상이 되는 시조는 대부분 당대 민들 사이에서 불려졌던 것이 선택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시조를 民謠로 인식하여 불렀고, 간혹 원민요의 내용을 변개시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任珽(1694~1756)의 「翻方曲」과 洪良浩(1724~1802)의 「靑丘短曲」, 「北塞雜謠」6)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당대 民謠가 流行되던 저간의 사정은 漢詩에 ‘--俚曲’, ‘--村謠’, ‘--農歌’, ‘--雜曲’ 등과 같은 樂府詩 題名이 붙은 시집이 대량 출현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題名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악부시집의 증표이기도 하지만, 기실 이것은 당대에 歌唱되던 민요를 한시로 재창작한 작품집인 것이다.

또한 이 시기 민요 확산7)의 유력한 증거로는 詩經 ‘國風’의 공식적 제기를 들 수 있다. 18세기 중엽, 英祖는 地方官에게 민요를 채집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바 있는데, 당시 이에 부응하여 대다수의 지방관이 민요를 채집하여 올린 바8)도 있다. 이 또한 당대에 다량의 민요가 유포되고 있었다는 간접증거인 셈이다.

正祖도 1781년부터 1796년, 약 16년에 걸쳐 經史講義를 시행하고 그 중에서도 詩經講義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룬 바 있다. 이같이 이조 정부가 詩經의 國風을 공적으로 환기함으로써, 당대 문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 저류에 民謠의 도도한 흐름과 확산이 있었다는 점이 전제되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상황전개에서 민과 근접한 시공에서 살았던 시인들은, 이를 계기로 적지 않게 民謠나 口碑物을 한시의 자장 안으로 포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口碑物을 수용한 시인은 적어도 구전되던 현실이나 民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시인들은 流配라던가 고을살이 등과 같이, 곧 그들의 생활 무대는 민과 넘나 들 수 있었던 여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기서 구비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민의 정서와 구비적 형상화 방식을 자신의 문학양식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구비의 확산에는 다양한 계층의 口演者가 일조를 한다. 당시의 구연자와 구연물은 다양한 편차를 지닌다. ‘이야기꾼’과 같은 능숙한 전문가가 있는 반면, 단순한 구연자도 있고, 구비물 또한 단순하고 잛은 것에서부터 완정한 줄거리에다 비교적 긴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대체로 구연자의 자질과 그 구비물은 서사문학의 확산에도 관계되지만, 한시의 구비수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몇 가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야기주머니 김옹은 이야기를 아주 잘하여 듣는 사람들이 다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옹이 바야흐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 살을 붙이고 양념을 치며 착착 자유자재로 끌어가는 재간은 참으로 귀신이 돕는 듯하니, 가위 익살의 제일인자라 할 것이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음미해보면 세상을 조롱하고 개탄하고 풍속을 깨우치는 말들이었다.9)


(2) 壬寅年 5月 下旬에 고을 사람 김아무개가 길손 하나를 데리고 놀러 왔는데, 임씨라고 하였다. 그는 집이 益山이며 나이 지금 63세인데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 지지 않았다. 한참 때는 용력이 굉장했으나 항시 스스로 숨기고 자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은 이슥하고 문풍지 바람이 우는데 길손이 鳥嶺서 호랑이 잡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기백이 매우 씩씩하니 곧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였다. 길손이 떠난 다음에 長句 한 편을 짓는다.10)


(3) 지난 戊寅年에 族兄인 徐有膺氏가 咸興의 通判이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족형이 다스리는 지역에 三百三十歲 되는 노인이 있어, 족형이 즉시 官衙로 招致하여 상세하게 그 발자취를 물었다. 그런데 그 노인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아무개로, 본래는 제주도의 村氓이었다가 중년에 商船을 따라 함흥으로 옮겼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느 진의 軍伍에 예속되었다가, 鎭이 혁파되자 土民이 되어 어느 집에 품을 팔아 지금 이미 그 5대조를 거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 祖父이래로는 품삯을 받지못하고 逋欠이 쌓여 마땅히 찾아야 할 것이 지금 三百餘緡이나 된다라고 하였다. 족형은 즉시 노인을 雇傭한 그 民을 추고하여 꾸짖으니 과연 그 노인의 말과 같았다. (……) 그 이듬해 己卯年에 족형이 관아에서 돌아가시자 노인이 와서 엎드리고 곡을 매우 슬프게 하였다고 한다. 族姪인 徐炯輔가 관아에 있으면서 직접 목도하고 나를 위하여 이처럼 전하고 또한 말을 해주었다. 근래에 북인에게 물어 보니 그 노인은 아직도 병이 없다고 하더라.11)   

(1)은 조수삼의 언급이다. 이른바 당시에 ‘說囊’으로 지목되던 이야기꾼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 金翁은 전문적 강담사다. 김옹과 같이 口演에 능하고 전문적 능력을 지닌 존재는 多種多樣한 이야기를 구연하면서 원이야기를 확대 내지 변개할 충분한 자질을 소유하였던 바, 이들이 서사양식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 있다. 그렇다고 당시의 口演者들이 모두 김옹과 같은 전문 이야기꾼은 아니다. (2)와 (3)의 예처럼 구연의 수준이 낮은 능력을 지녔던 초보적 구연자도 존재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이야기꾼이 구연한 서사물도 모두 野談이나 記事와 같은 서사양식에 기록되었던 것은 아니다. 더러는 한시로 정착되면서 서사한시로 성립되기도 하는데, (2)와 (3)의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2)는 이형보(1782~?)의 <鳥嶺搏虎行>이라는 敍事漢詩다. 시인은 입심 좋은 길손이 구연한 내용을 듣고, 그것을 소재로 한시로 창작하고 있다. 사실 길손이 구연한 것은 젊은 시절 자신의 경험담이다. 그 길손은 하층신분에다, 전문적인 구연자도 아니다. 흔히 野談에서 민중기질을 나타난 작품이 더러 보이거니와, 길손이 구연한 것은 바로 민중기질을 지닌 사나이의 무용담인 셈이다. 시인은 입심 좋은 초보적 이야기꾼이자 武勇을 지닌 그 사나이로부터 호랑이를 때려잡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한시로 포착한 것이다.

시의 내용도 야담적 성격 그대로다. 이 야담적 성격은 구연의 과정으로 그리된 것으로 보인다. 시인 또한 作中에서 “재미난 이야기 실가락 풀리듯 듣노라니 턱이 절로 벌어지네 / 솔잎에 이슬 대숲에 바람 참으로 청신한 밤이었노라(佳話縷長解我㶊 / 松露竹風作淸宵)”라고 형상하여, 그 길손이 뿜어내는 입담에 넋이 빠져 있을 정도라고 이야기의 흥미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작품에서 武勇談을 구연한 길손은 비록 전문적인 이야기꾼은 아니지만, 능수 능란한 이야기 솜씨로 좌중을 사로잡았고, 마침내 시인은 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포착하여 서사한시로 꾸몄던 것이다.

(3)은 徐有本(1762~1822)의 <咸關老人歌>라는 敍事漢詩의 小序이다. 구연을 통해 한시로 정착되는 과정이 선명하다. 시인은 자기 족질인 서형보로부터 삼백여세도 더 살았던 한 노인의 기이한 삶을 제보 받고, 작품으로 형상 하였음을 밝혀놓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族姪인 徐炯輔가 구연자겸 제보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야기 전달자에 지나지 않을 만큼 그 역할이 단순하다.

사실 漢詩는 野談과 달리 구연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구연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이야기를 구연하는 자들이 그만큼 다양화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계층에서 나온 다양한 자질을 지녔던 구연자가 활동함으로써, 서사문학에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며, 그들의 활동으로 구비물이 다면적으로 확산되면서 한시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주고, 한편으로는 이를 계기로 서로가 교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한시는 어떠한 구비물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었던가? 이에 대한 방식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비물을 모티프화 하여 옮길 수도 있고, 민요의 경우와 같이 직접 듣고 再現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정도차이가 있겠지만, 정형화된 한시양식에 구전 이야기나 구전가요가 수용되면, 대개 원가요가 변개됨은 필연적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한시의 구비수용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한시의 민요취향은 일찍이 지적된 바 있거니와, 그 외에도 당대에 구비되던 설화나 사실에 근거한 체험담을 위시하여 당대에 불려졌던 타령조 가락 또는 민요화된 시조 등, 다양한 구비물이 한시에 수용된다. 먼저 익히 알고 있는 사례를 보기로 한다. 민요를 한시로 수용한 경우다. 



(1) 雀兮莫食苗            ‘참새야 뿌린 싹 먹지 마라

    爾飽我當饑            네 배부르면 우리네 굶주린다.’

    兒兮善逐雀            아이야 후여 후여 참새 쫓아

    日暮莫遽歸            날 저물도록 돌아오지 말아라.

    然彼微物亦求食        저것들도 살려 저러는 것이니

    愼物妄殺當驚飛       함부로 죽이진 말고 쫓아 보내기만 하거라.


(2)        헤라 헤이

    새야 새야 참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말아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명년농사 무엇으로 하겠네

    헤라 헤이


(1)은 耳溪 洪良浩(1724~1802)의 <莫食苗>12)라는 작품이고 (2)는 <새쫓기>13)라는 童謠다. 모두 가을 추수 때 참새를 쫓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가을의 정경을 담아 내고 있다. 한시는 <새쫒기> 동요를 완전하게 수용하고 있지 않으나, 이미 내용상 그 상동성이 인정된다. 전체 분위기와 意境, 詩句의 內的 韻律이라든가 그리고 형상화 방법 등에서, 그 친연성을 감지할 수 있으며, 시적 화자 또한 일치한다. 두 작품 모두 민요를 부르는 唱者를 시적인 화자로 설정하고 있다. 한시의 경우 이는 일종의 대리진술이다. 

표현방식에서도 비숫한 점이 있다. 漢詩의 ‘저것들도 살려는 것이니’라는 의미와 童謠의 ‘너도 먹고 나도 먹고’라는 구절은 일단 서로의 생존문제에 대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이는 시인이 주관적 시점으로 형상하지 않은 결과이다. 대개 새 쫓는 일은 아이들의 몫이다. <새쫒기>는 아이들이 새를 쫓으며 부르는 동요이자 노동요이다. 한시도 이를 십분 이해하고 있다. ‘아이야’라는 의성어를 ‘兒兮’라 묘사하여 현장감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러하고, 새와의 대화를 통해 전체를 구성하여 노동요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아이와 새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시에서는 ‘雀兮’라 하여 새를 향해 의인화한 언어를 구사하여 생동하게 포착하였다. 이는 곧 독백의 형태이기도 한데, 노동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더욱이 거기에 한시에서 즐겨 쓰지 않는 산문적 언어인 ‘然’을 배치하고, ‘함부로 죽이진 말고 쫓아 보내기만 하거라’와 같이 형상하여, 독자로 하여금 참새에 대한 생존을 긍정하도록 시상을 전환시켰다. 民謠의 정감이 그대로 우러난다. 비록 한시가 그 양식적 특성상 民謠와 똑같이 재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하더라도, 이같이 가능한 범위에서 민요의 의미와 정감을 충분히 살려내면서 再現하고 있는 것은 구연을 수용한 결과이자, 이를 십분 의식한 작가의식의 배려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민요와는 달리 그 취향과 정감이 다른 것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1) 梧桐秋月夜來明      오동추야 달 밝은 밤에              

    此地無端暗恨生      무단히 남모르게 한스러운 심사  

    輕滴麤鳴窓外雨      비 내리는 창밖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浪浪颯颯葉乾聲14)    떨어져 흩날리는 마른 나뭇잎 소리 


(2) 오동동 추야에 달이 둥실 밝은데 / 가신 님 그리워 잠 못 자겠구나 / 아뜰사뜰히 그리던 사랑은 / 얼마나 보며는 싫도록 볼거나.……15)


(1)은 茶山의 外孫인 舫山 尹廷琦(1814~1879)의 시며, (2)는 민요다. (2)의 민요는 다소 길지만 한시에 호응되는 부분을 옮겨놓았다. “한가위 날 李來山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의 한시에서 알 수 있듯이, 방산은 예전에 들었던 육자배기풍을 회상하면서 한시로 적어본 것이다. 아마 시인은 이 흥겨운 노래를 李來山이라는 벗과 함께 들었던 것 같다. 원래 육자배기풍은 다소 흥겨운데 반해, 이 시의 여성화자는 哀調를 드러내 놓고 있다. 일단 시인은 들었던 가락을 재현한 터라, 이를 충분히 의식하여 여성화자의 시점에서 독백의 형태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시를 보더라도 그 가사는 지금의 노랫말 어느 부분을 금방 연상시키는 바 있거니와, 마치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더욱이 詩語의 驅使나 배치방식도 平易하고 그 정감도 사실적이다. 그렇지만 시는 제시한 민요와 다소 차이가 난다. 아마도 민요의 전부를 옮기지 않고, 부분적으로 발췌해 놓은 것에서 연유한 바 있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7언 4구의 정형화된 한시 형식에 노래사설을 옮기다 보니 초래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또한 당대에 널리 구연되던 說話나 野談 등을 수용하여 서사한시로 창작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야담의 근원이야기는 당대에까지 널리 알려진 내용이거나, 아니면 제보자가 제공한 흥미로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경우, 작품의 형성과정에서 구연과정을 거쳐 한시에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야담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연의 전통을 십분 활용하는 셈인데, 洪愼猶(1722~?)의 <柳居士>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야담으로 널리 전하는 ‘바보 아재(癡叔)’이야기16)를 소재로 삼아 서사한시로 꾸민 것이다. 다소 길지만 유거사가 중으로 변장한 일본의 첩자를 사로잡아 꾸짖은 장면을 적시해 보기로 한다. 


居士手拔刀       거사가 손으로 칼을 뽑아들자

虹光十丈吐       무지개 빛 열 장이나 뻗쳐오른다.

飛身跨傭腹       몸을 날려 중놈 배를 짓눌러 타니

氣勢猛如虎       기세가 호랑이보다 사나와라.

眼睜飛電閃       눈동자 부리부리 불꽃이 튀고

聲厲巨雷吼       사납게 내지르는 소리 천둥이 울리는 듯

問僧何從來       중놈에게 묻기를 “네놈은 어디서 왔느냐?

汝豈非倭虜       네놈은 왜놈이 아니더냐?

何人當爲將       어느 놈이 마땅히 장수가 될 것이며

何日事當擧       언제 일을 벌이려 하느냐?

汝雖偵探我       네놈이 비록 나를 염탐하러 왔다만

我見汝肺腑       나는 네놈의 폐부까지 꿰뚫고 있다.

無謂國無人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無或敢余侮       행여 나를 업수이 보지 말아라.

看我刀如霜       서릿발같은 내 칼을 보아라

何難刌膾脯       네놈의 살을 저며 포를 뜨는 것 무엇이 어려우리.

差汝不足殺       하지만 네놈은 죽일 거리도 못되는

一孤雛腐鼠       한 마리 병아리 썩은 쥐새끼며

況我八路間       더구나 우리 조선 팔도가

兵火亦天數       병화가 일어남은 하늘의 운수니

以我大心胸       내 크고 넓은 마음으로

饒汝命一縷       실날같은 너의 목숨은 살려둔다.

嶺南安東郡       영남의 안동고을은

人民僅萬戶       인민이 거의 만 호

我家亦安東       내 집 또한 안동이며

家累百口有       집안의 식솔이 백이나 되니

一邑百里中       백리 되는 한 고을에는

汝勿過師旅       네놈은 군대를 보내지 말아라.

冥頑違吾言       어리석게도 내 말을 어긴다면

汝吭當往斧17)    네놈의 모가지를 도끼로 날려 버리리라”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것도 이야기방식이지만, 내용도 野談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단지 유거사를 형상하는 방식에서 다소 차이가 날 뿐이다. 위에 인용한 장면은 柳居士의 행동에 초점이 모아져 있고,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장면묘사나 다른 상황에 대한 묘사에는 전혀 시선을 두지 않는다. 이는 구연하는 방식과 상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체로 구연자가 어느 이야기를 암기하여 구연할 경우, 구연의 성격상 복잡한 장면제시나 다른 인물에 대해 시선을 두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이러한 것은 구연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것은 물론이며, 구연과정에도 적지 않은 방해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연자는 자연히 등장하는 주인공에 모든 시선을 모아서 구연하고, 또한 진행방식도 그의 행동에 따라 줄거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 작품도 이러한 구연의 전개방식과 그다지 어긋나지 않거니와, 대체로 유거사의 행동에 맞추어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다. 시인이 이러한 구연의 원리를 십분 활용하여 서술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중으로 가장하여 당시 명정승인 유성룡을 암살하려는 倭諜을 단번에 굴복시키는 유거사의 행동은, 실로 ‘癡叔’이 아니라 미래를 예견하는 異人의 면모가 선명하다. 여기에 대한 장면세시 수법 또한 극적이다. 이 점을 십분 고려한 바탕에서, 서사한시와 야담의 인물형상을 비교해 보면, 서사한시 쪽이 인물형상에 대한 장면제시가 훨씬 극적이며 풍부할 뿐만 아니라, 주제사상 또한 더욱 밀도 있게 구성되어 있다.

사실 유성룡은 숙부가 없었다. 아마 치숙 이야기는 실제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듯하다. ꡔ동패낙송ꡕ에서도 유거사를 유성룡과 연결시켜 놓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구연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이고, 그 배경은 임진전쟁 당시의 상황과 연계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安東지방이 유일하게 倭賊에 의해 짓밟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류의 이야기가 생겨났던 것 같고, 이 이야기는 점차 적층화되면서 한시에까지 스며들어 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작품은 野談과 漢詩가 교섭하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이 외에, 특정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說話를 수용한 경우도 상당 수 있다. 그 중 한 작품을 예시해본다.


江陵舊是東原國     강릉 땅은 그 옛날의 동원국

往跡尙傳無月郞     지난 사적에 무월랑의 이야기 아직도 전해져 오네.

白馬金鞭冶遊處     금채찍에 백마 타고 마음껏 노닐던 곳

蓮花峯下誰家庄     연화봉 아래 그 누구네 농장인가?

有美一人洴澼絖     아리따운 한 처녀 솜 빨래를 하는데

珠波玉手互低昻     아롱대는 물결에 옥같은 손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누나.

郞也邂逅驚且喜     무월랑 뜻밖에 만나니 놀랍고도 하 기뻐

含情不覺暗斷腸     연정이 절로 나와 애간장을 끓이누나.

試欲挑之相問答     가만히 다가가서 서로 문고 답을 하노라니

其言凜凜色且莊     그 대답 늠름하고 자색마저 당당해라.

唯期徐結月老繩     오직 중매를 통하여 가만히 맺기를 기약하고

不許偸窺宋玉墻     낭에게 담장을 보는 것도 허락조차 하지 않네.

郞歸月城信久斷     낭은 월성으로 돌아가 소식마저 끊겼으나

女在深閨誓不忘     그 처녀 규방에 있으면서 언약을 잊지 않는구나.

爺孃不知心內事     아버지 어머니 속내를 모르고서

卜日將欲延東牀     날마저 받아놓고 사위를 보려하네.

臨池暗語感鬼神     못에 닿아 남몰래 말을 하니 귀신조차 감동하여

赤騰騰出覺非常     붉은 고기 뛰어올라 보통일 아닌 줄 느꼈구나.

春羅半幅血爲字     고운 비단 반폭에다 혈서를 서서

納之魚口投滄浪     고기 입에 넣어서는 창랑수에 던졌다네.

是時阿郞索鱠魚     이 때에 낭군은 횟감을 구하던 중

金盤尺鯉倏跳踉     금비늘 한 척 잉어 별안간 뛰어 오르는구나.

俄然呀呷吐涎沫     가만히 입벌리며 물거품을 토하는데

中有素書書十行     그 속에 흰 편지 구구 사연 열 줄로 되었어라.

郞也將書謁紫宸     낭군이 편지 들고 임금께 배알하니

異事驚動新羅王     기이한 일 드디어 신라왕을 감동시켰다네.

遂命大臣與郞俱     드디어 대신에게 명을 내려 낭군과 함께 하도록 하고

星馳乃及期日良     쏜살같이 달려 길일에 닿았더라.

白幕如雲衆賓會     흰 장막에 구름같이 많은 손님 모일 적에

忽見郞到皆蒼黃     문득 낭군이 도착하니 모두들 뜻밖이라 놀래누나.

可笑北坪少年子     우습구나 北坪의 젊은이

半道虛返靑絲韁     혼인길 도중에 부질없이 청사초롱 말고삐 돌리누나.

夫人托病不梳洗     낭자는 병이라 핑계대고 단장도 않더니만

此日始起理新粧     이날에야 비로소 일어나 몸단장을 꾸미누나.

靑鸞肯作木鷄伴     청기러기 기꺼이 목계와 짝을 하고

玉簫和鳴雙鳳凰     옥퉁소 좋은 소리 쌍봉황이 화답하네.

也知金鯉作良媒     이제야 알았노라 금잉어가 훌륭한 매파되니

不待玉杵搗玄霜18)  옥도끼로 丹藥찧기 기다리지 않을세라.


이 시는 김이만의 <蓮花峯歌>인데, 남녀주인공이 결연하는 과정을 적출한 것이다. 이 작품은 강릉지방에 전해져 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說話의 대략은 이러하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 서생이 유학하면서 명주에 왔다가, 양가집의 어여쁜 여자를 보고 詩로서 유혹하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과거시험을 본 후 부모님께 아뢴 뒤 성혼을 하자하고 유혹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생이 서울로 돌아간 뒤 그 여자 집에서는 사위를 보기 위하여 혼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그 여자는 평소에 아끼면서 길러온 잉어에게 사연을 적어 주고 서생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잉어는 마침 부모를 공양하려고 고기를 구하던 서생에게 팔려 그 편지가 보여지게 되었다. 서생은 그 편지를 아버지께 보이고 곧장 여자 집으로 가니 그 여자 집에서도 감동하고 이미 정혼하려던 신랑을 보내고 서생을 사위로 맞이하게 되었다 한다.19)


설화의 기본줄거리와 시의 내용은 서로 비슷하지만, 기본줄거리는 神異하다. 작가는 위의 시에서 구전된 설화에 근거하여 창작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이 일은 분명히 여지승람에 전해오니, 이는 야인들의 황당한 이야기 아니로다(此事分明載輿誌, 不是野人說荒唐)”라 언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古詩歌인 <溟州歌>의 배경설화이기도 한데, 蘭坡 李居仁(?~1402)이 지은 전기소설과 흡사하거니와, 허균은 이를 <蓮花夫人>이라고 소개한 바20) 있다. 요컨대, 이 ‘蓮花夫人’이야기는 <溟州歌>의 배경설화로 전승되다가 傳奇小說로 정착되기도 하고, <蓮花峯歌>와 같이 한시로 정칙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蓮花峯歌>는 <蓮花夫人>과 비교해 보면 그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結緣과 婚事障碍의 대두라던가, 남녀주인공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편지를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 방식 등에서 서로 상동성이 보인다. 이 몇 가지 점을 비교하면 위의 시는 마치 <蓮花夫人>을 옮겨 놓은 듯하다.

<蓮花峯歌>는 작품의 서사진행 방식이 마치 구연하듯이 기술되어 있고, 서사도 낭자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점은 구연을 수용한 것에 기인하는 바 있다. 기실 <蓮花峯歌>와 같이 한시에서 설화를 받아들인 사례는 드문 경우이며, 또한 서사의 형태로 포착한 것은 더욱 흥미롭다. 그리고 口傳의 이야기가 상이한 서사양식에 각각 정착하는 것은 각 서사의 혼합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구비전통이 서사의 각 양식들과의 교섭에 역할을 하고, 서로가 넘나드는 것에 일정한 가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 이조후기 敍事學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사안이 아닌가 하다.

이처럼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金昌翕(1653~1722)의 「赤池歌」와 「赤島歌」라던가 洪良浩의 「掛弓松」․「射龍臺」21)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함경도 지방에 퍼져 있는 李太祖家의 설화을 차용하여 서사한시로 옮긴 것이다. 이와는 달리 당대의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민담을 서사한시의 소재로 포착한 경우도 있다. 洪錫謨(1781~1850?)의 「破甕行」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옹기장수가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헛된 꿈을 꾼다는 내용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장수 주먹구구’니 또는 ‘독장사 경영’이라는 민담의 확대재편이다. 또한 이학규의 <乞士行>은 연희마당에서 부르는 장타령을 수용하고 있고, 李安中의 <肥年詞>은 ‘소원풀이’와 같은 신세타령 사설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앞서 예시한 몇 가지 점에서, 앞시기와 달리 이조후기에는 한시의 구비수용 양상이 매우 폭넓고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口碑受容과 形象化 方式

구전된 문학은 엄격하게 말하면 작가가 없다. 그래서 구전을 바탕으로 한문학 양식으로 형상할 경우, 그 양식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구비물과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어느 작품이 구전에 바탕하고 있다 하더라도, 특정한 양식에 작품으로 정착되면,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작가의 창작의식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특히 한시처럼, 그 양식적 엄정성과 고도의 미적 규율을 요하는 양식일 경우, 그 창작의식은 단순한 기록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비를 한시양식으로 옮긴다던가 수용할 경우, 작가와 작가의식을 십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바 있다.

하지만 본 논의에서는 이 점을 미리 고려하지만, 보다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한시가 구전을 수용하면서 형상화 방식을 어떻게 갱신하고 있는 가라는 것이다. 이 점이 구비전통의 양상과 그 수용의 실상을 보다 선명하게 밝히는 효과적인 작업이 되리라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은 발생적으로 주요한 차이가 있다. 우선 기록문학은 문자에 의해, 구비문학은 구비전승에 의해 성립된다. 이는 두 문학양식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예컨대 기록문학은 일단 기록된 작품의 형태로 성립되면, 그 뒤로 변화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기록문학은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반면에 구비는 작품으로 성립된 뒤에도, 전승되는 시공에서 적층화되고 변화된다. 이 점에서 구비문학은 개방적이고 살아있다. 주지하듯이 구전이 기록으로 정착될 경우, 기존의 기록양식은 그 내재적 양식의 규범에 따라서만 전일하게 형상화할 수 없게 된다. 즉 구비적 영향을 다분히 받게된다. 말하자면 기록양식은 구전의 내용과 내적 규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시가 구비물을 수용한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요컨대 구비물을 수용한 한시는 그 구비물의 질과 구비물이 구비양식이 지닌 내적인 규율에 의해, 변화 내지 변모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1) 말하기․부르기의 구성원리

한시가 구비물을 수용한 경우, 일단 그것을 한시로 형상할 때, 그 재현방식에서 구비양식의 원리를 대폭 수용한다. 이른바 口碑내지 歌唱의 원리를 십분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 원리는 ‘말하기-듣기’ 또는 ‘부르기-듣기’라는 이야 기내지 부르는 방식을 말한다. 즉 구비물을 수용한 한시는 이야기성․가창성의 구성을 강하게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인이 口傳의 원리를 십분 의식한 바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구비수용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昔有一夫學此工,     “옛날 어떤 사람이, 독짓는 재주를 배워서

往來長安換靑銅.     독집 지고 서울을 갔다 왔다, 돈을 받고 팔았지요.

夕陽歸來樹木陰,     한번은 저물어 돌아오는 길, 나무 그늘진 아래서

芳堤下擔納淸風.     둑에 짐을 받치고, 바람을 맞으며 쉬다가

須臾日落歸鳥過,     어느새 해는 떨어지고, 날새들 집을 찾아 돌아가서

四顧漠漠只平坡.     사방 둘러봐도 막막히, 평평한 언덕 뿐인지라.

轉身仍入甕中宿,     혼자 몸을 웅크려,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니

脚過耳兮背如鼉.     무릎은 귀 위로 솟고, 등은 마치 자라 모양.

低頭點點指頻屈,     숙여진 머리로 셈을 하느라, 손가락을 부지런히 꼽아

十日卄日價漸多.     열흘 스무날 날이 가는 대로, 버는 돈 점점 많아져

息貨如山堆無窮,     동전이 산처럼 불어나서, 무진장 쌓여는 가니

窶兒忽成富家翁.     곤궁한 아이는 졸지에, 부잣집 샌님으로 변했구나.

身邊不覺甕之小,     제 몸이 지금, 항아리 속에 있는 걸 잊고.

心中只喜財益豐.     재산이 날로 풍족해가자, 아주 마음이 들떠서

倏擧雙袖舞參差,     벌떡 일어나 두 소매,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

揮手頓足如狂痴.     팔목을 휘젓고 발을 구르며, 미친 듯이 나대는데

東倒西顚樂未已,     앞으로 자빠지고 뒤로 엎어지고 너무나 좋아서

片片甕破渾不知.     항아리 산산조각 났는데도, 그 사람 깨닫질 못하네.

陶朱巨富空流涎,     부자 장자 부러워, 공연히 침을 흘리다가.

千金還似春夢然,     천금의 재물을 봄꿈에 얻은 듯하였도다”22)   


번잡하지만 다소 길게 인용하였다. 이 작품은 陶厓 洪錫謨(1781~1850)의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이른바 ‘독장수 주먹구구’라는 民譚을 받아들여 서사한시의 형태로 구성해 놓은 것이다. 인용문은 ‘독장수 경영’에 관한 부분이다. 한시에서 민간의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민담을 소재로 한 예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본래 ‘독장수 주먹구구’라는 민담은 이조후기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ꡔ고금소총ꡕ이나 ꡔ송남잡지ꡕ와 같은 여러 문헌에 보이는데, 그 중 하나만 예시해 보기로 한다.


옹기장수가 옹기 한 짐을 지고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가만히 셈을 해보았다. ‘한 푼 어치를 대면 이 푼을 벌고, 이푼어치를 대면 사푼을 번다. 또 일전 어치를 대어 이전을 번다면 한 짐이 두 짐이 될 것이고, 두 짐이 네 짐이 된다. 그리고 한 냥이 두냥이 되고 두냥이 네냥이 된다면, 조금씩 배로 많아져 종국에는 억만냥이 될 것이다.’ 이에 생각하기를 ‘재산이 이와 같다면 대장부가 세상에 처하여 어찌 처가 없겠는가? 처가 있고 난 뒤에는 어찌 가정이 없겠는가? 가정이 있고 난 뒤에는 어찌 살림살이가 없겠는가? 이같은 뒤에 一妻에 一妾을 두는 것은 남아가 흔히 있는 일, 처와 첩이 있은 뒤에 만약 싸우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이같이 때릴 것이다.’하고 즉시 지게를 고인 막대기를 뽑아서 옹기를 마구 때린 뒤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결코 되지도 않는 말이었다. 단지 옹기만 모두 깨어졌을 뿐 아니라, 지게도 함께 부셔졌고 옆에는 단지 세푼어치되는 동이만 하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다가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 대장간으로 들어가 비를 피해 앉아있었다. 다시 셈하기를, ‘이 세푼의 값이 나가는 것으로 여섯 푼을 벌고, 여섯 푼으로 옹기 두 개를 사서 일전을 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배로 불려나가면 그 수를 도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머리를 흔들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그 마저도 아궁이 벽에 그만 부딪혀 깨어져 버렸다.23)


옹기장수의 헛된 꿈과 慾望에 대한 내용이 매우 재미나게 기록되어 있다. 시의 줄거리도 민담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예시한 민담도 그렇지만 인용한 시도, 마치 화자가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직접 이야기하듯이 구술하고 있다. 口述的 口氣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시의 서두에서 “옛날 어떤 사람이…… (昔有一夫……)”라는 식으로 구성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치 古談을 서술하는 전형적 서두방식과 같다. 시에서 인용한 부분은 민담의 대강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는 시의 줄거리이기도 하다. 시의 서두와 말미는 시인의 정회부분으로 매우 짧다. 이를 고려하면 시의 핵심은 서두부터 이미 이야기식의 구성원리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구성은 시적 화자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곧 이 시의 화자는 민담을 이야기하는 구연자이다.     

그 예는 李馨溥(1782~?)의 <鳥嶺搏虎行>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우리 고을 김군이 길손 한사람 데리고 / 버드나무 그늘 뚫고 와서 나의 심심무료 달래는구나 / …… / 재미난 이야기 실가락 풀리듯, 듣노라니 턱이 절로 벌어지네 / 솔잎에 이슬 대숲에 바람 참으로 청신한 밤이었노라.(吾州金君携一客, 穿到柳陰慰寂廖, …… 佳話縷長解我㶊, 松露竹風作淸宵”라는 방식으로 형상하고 있다. 구비물을 수용하여 서사한시로 되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밝혀져 있다. 시인은 호랑이를 잡은 한 장사의 武勇談을 직접 듣고 이를 줄거리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길손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古談의 口氣가 다분히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투다. 시인은 이러한 이야기의 원리를 구사하여 서사한시로 재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마치 이야기의 구연자가 현장에서 민담이나 무용담을 구술하는 듯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은 구연자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길손인데, 그의 역할은 마치 구연자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시의 내용은 서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옹기장수의 외모나, 그의 행동이 일어나는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시인은 오직 옹기장수의 행동에만 관심을 쏟고,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서술하고 있다.24) 이는 민담이라는 구비물을 받아들인 결과로 그렇게 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비물의 수용과 이야기식의 서술방식은 한시의 서사화의 길25)에도 일조를 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구비물을 한시 양식으로 재현한 것 자체 만으로도 일정한 문학사적인 의의가 있다. 그러나 구비물을 한문학 양식으로 재현할 경우, 어떻게 재현하는냐에 따라 그 의의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구비물을 한시 양식으로 형상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구비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한시의 양식적 규범에 의거해, 구비물의 내용을 축소 내지 변개시킨다거나 왜곡시켜 구비물과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예는 高麗의 小樂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현과 민사평은 고려속요와 민요를 한시로 옮기면서 칠언 절구의 정형틀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바, 그 작업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구전가요를 고정된 정형틀에 구겨 넣은 셈이 되어, 결국은 본래 가요와 어긋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악부는 歌唱性이나 노래가락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시의 정형화된 규범 쪽으로 경도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조차도 의경이라던가, 내용에서 口傳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조후기의 소악부는, 고려말의 경우와 다소 다른 바 있다. 구체적으로 적시해보자. 洪良浩(1724~1802)의 <解纜>은 당대에 가창되던 민요를 한시로 포착한 것인데, 그 형상방식은 ‘부르기-듣기’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1) 解纜方擧帆          닻줄 풀어라 돛을 올려라.

   問君此去何時歸      “이제 가시면 언제나 올 건가요.  

   滄波渺無際           푸른 물결 아득히 끝이 없는데,

   好好往來疾如飛      아무쪼록 날듯이 탈없이 갔다오소서.

   從此遠浦鳴櫓聲      지금부터 浦口서 멀어져 노 소리 들리면,

   是妾腹斷眼穿時26)    이 몸은 애간장 태우며 뚫어져라 볼 겁니다.”


(2) 닷쟈 나니 이제 가면 언제 올고

   萬頃蒼波의 가듯 도라오소

   밤중만 지국총 소예 긋 여라27)


(3) 달뜨자 배 떠나니 / 이제 가면은 언제나 오나 / 만경창파 저 수중에 /

    나는 듯 이만 다녀오소 / 가시다 동남풍 불면 / 내 한숨인가 여겨주소28)


(2)는 작자미상의 시조다. (3)은 北關에서 그 당시 불려지던 민요의 일부분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계가 경흥부사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불려졌던 민요를 채록한 것이 「北塞雜謠」29)인데, <解纜>은 그 중의 한 수다. 예시한 세 작품 모두 意境이나 시적 구성은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상동성은 ‘부르기-듣기’의 원리를 수용한 결과 그렇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시적 화자 역시 작가가 아니라 민요를 부르는 여성화자다. 노래를 한시로 옮길 경우, ‘부르기’의 구성을 십분 활용하여야 그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解纜> 역시 시조나 민요 못지 않게 가창적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미 가창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민요의 정형구와 비슷한 5․7․5․7․7․7이라는 개방적 양식인 長短 6句로 재현하여, 민요의 구절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 각각의 句에 이미 內的 韻律性과 音樂性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적 구성에서도 부르기의 흔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 작품 모두 시적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과 여성의 시각으로 님과 이별하는 순간을 말하고 있는 것도 그 예증이다. (1)의 한시는 질문하는 주체를 여성화자임을 분명히 하고, 그 이별의 대상을 ‘君’이라 정확히 지적하여 그 실감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5구와 6구에서는 시조나 민요처럼 님이 떠난 뒤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님과 이별하는 그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여 현실감을 재고시키는 쪽으로 형상하였다. 더욱이 님과 이별하는 객체를 是妾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남녀간의 이별의 정과 아픔이 오히려 곡진하게 잡아 놓았다. 이러한 것은 歌唱의 현장감과 부르기의 實感을 십분 의식하고 지은 작가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이른바 ‘부르기-듣기’의 가창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한 것이다. 

대체로 시인이 구전하는 내용을 한시로 포착한 경우, 이러한 ‘말하기-부르기’라는 구성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 원리는 기존의 한시가 가지고 있던 엄정한 규정성, 예컨대 平仄, 句數, 詩語의 사용과 意境, 그리고 詩語의 직조방법 등과 그다지 조화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러한 원리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서, 결과적으로 한시의 양식적 규범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원리는 敍事漢詩의 성립에도 일정한 길을 제공할 뿐 아니라, 時空의 단일화나 장면제시수법, 시어와 정감의 확대, 그리고 다중시점의 도입과 같은 형상화 방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비전통을 수용한 한시가 대부분 長短句나 樂府형식이 많은 것을 볼 때, 구비전통은 한시의 형식적 변화에도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2) 單一時空과 場面化

時空의 문제는 서사학의 주요한 사안이기도 하지만, 서정양식에서도 고려해야할 사안이다. 이 시공의 문제는 구비문학은 물론, 구비전통을 수용한 한시 작품에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비전통을 고려한 한시는 그 편폭에 관계없이 비교적 서사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비물을 구연하거나 부르던 현장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시인이 구비물을 들었던 상황을 인식하여 재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대체로 口碑라든가 見聞의 기억은, 그 특성상 특정사건이나 장면을 중심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구비문학이 취하는 시공의 구성방식과도 일치하는 바다.30) 따라서 구비적 전통을 수용한 한시는 등장인물이나 그를 둘러싼 이외의 것과, 상황이나 장면의 구체적 묘사에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구비물을 수용한 한시의 경우도 구비의 그것과 비슷하다. 즉 한시로 재현한 時空은 비교적 單一하고 場面中心的이라는 점이다. 우선 廣文(達文)의 이야기를 서사한시로 포착한 사례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보도록 한다.


善作八風舞     달문은 팔풍무를 추는데

魚龍更曼延     물고기 용이 꿈틀거리며 노는 듯

外屈頭至足     몸을 뒤로 젖히면 머리가 발에 닿고

臍腹兀朝天     배꼽이 불쑥 하늘을 쳐다보네.

四體若無骨     온 몸이 유연하여 뼈가 없는 듯

閃倏回且旋     삽시간에 몸을 돌려 뒤집더니

俄膺瞥而改     어느새 휙하고 바꾸어

植立忽爾顚     꼿꼿이 섰다가 갑자기 넘어진다.

側目無正視     바로 보지 않고 눈을 흘기더니

喎口無完言     삐뚤어진 입에 나오는 대로 떠드누나.

鰲棚左右部     산대의 좌우부에

長安惡少年     장안의 악소년 무리들

延之坐上頭     그를 모셔다 상석에 앉히고서

敬之若鬼神     귀신이나 모시듯 떠받드네.


홍신유(1722~?)의 <達文歌>의 일부이다. 이 작품은 敍事漢詩로 달문이라는 사실적 인물을 담고 있다. 達文은 일명 廣文으로 영조 때, 전국적 명성을 얻었던 인물인데, 燕巖의 <광문자전>의 주인공 바로 그사람이다. 그는 산대놀이의 예인으로, 기방의 패트런으로, 京江의 대부로 활약하다, 마침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종적을 감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리하여 그는 逸話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 속의 인물, 곧 야담적 인물이 되었거니와, 위의 작품도 이처럼 당대에 널리 전해져 구연되던 달문의 일생을 포착한 것이다.

인용 부분은 서울의 시정에서 펼쳐진던 산대놀이의 유력한 예인으로 초대되어 춤사위를 하는 장면이다. 인용 부분은 달문이 팔풍류를 추는 장면을 특화시켜 놓은 듯하다. 여기서의 시공은 달문이 춤사위 하는 현장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시간과 공간은 달문의 다양한 춤사위와 그의 행동에 의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의 시간은 자연적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단지 달문의 다양한 행동에 의해서 감지되는 경험적 시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간조차도 달문의 행위와 관련된 시간만이 확인되고 있다. 공간 또한 달문이 행동하는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품에서도 오직 달문이 춤사위를 하는 공간 만이 등장할 뿐 다른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작품의 時空은 單一하고 달문의 행동에 모아져 있다. 시인은 달문의 행동이외에는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이렇듯 작품에 보이는 時空은 달문의 행동에 의해 확인되기 때문에 비교적 단일하다. 이러한 구성은 장면을 특화 시키는데 매우 유리하다. 마치 소설적 장면의 제시방식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앞서 이러한 장면의 특화와 촛점화는 인물의 행동에 의해 직조된다는 언급하였거니와, 이는 인물을 전형적으로 포착하는데도 매우 유리한 바 있다. 이 점 형상화 방식상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서사성이 뚜렷하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서사적인 구비물을 수용한 경우는 물론이며, 당대에 불려지던 민요를 수용한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이 경우, 어느 한 장면을 특화 시킨다. 한 작품을 예시해 본다.


今日寒政苦     오늘 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추위

鴛鴦薄不暖     원앙이불조차 얇아 따뜻하지 않아요.

竟夜交郞抱     이 밤 지새도록 낭군 님과 끌어안다가도

回首向郞道     머리 들어 낭군 님께 이렇게도 말하지요.

不知東家婦     “건너 집 아낙은

獨宿寒何許     독수공방이라 얼마나 추울까요?”


今夜不張燭     오늘밤은 불을 밝히지 않아        

不見阿郞面     낭군님 얼굴 보이지가 않고요

但聞香氣息     들리는 것 체취에다 숨소리뿐이었지요..

朝來對鏡看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았더니

如何臉邊朱     어쨌기에 제 뺨의 화장이

一半着郞面31)   반은 낭군 님 얼굴에 묻었나요?


玄同 李安中(1752~1791)의 시이다. 내용은 문무자 이옥의 ꡔ俚諺ꡕ의 그것과 흡사할 정도로 濃艶하다. 시가 지닌 내적 운율성이라든가 여성화자의 진술 등에서 이미 민요의 가창성과 상동성이 보인다. 여기서 작품의 時空은 밤과 아침, 그리고 잠자는 규방이다. 작품은 시간의 순서에 의해 사건이 진행되지만 공간은 특정공간인 규방이다. 하지만 공간과 대상은 여성화자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와, 그 뒤의 행동에서 알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밤과 아침이며, 장소는 사랑을 나누고 잠을 청했던 바로 그 방임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인 화자가 행동한 곳이 바로 그 공간이며, 행동의 연속은 바로 시간의 흐름이다. 이처럼 時空 모두 등장인물의 행동에 관련된다. 그 이외의 時空은 없다.

그러면서 등장인물의 행동은 특화 되어 있고, 그 특화는 다름아니라 선명한 장면의 제시와도 같다. 게다가 ‘건너 집 아낙’의 ‘독수공방’도 주인공의 언어와 행위에서만 감지된다. 이처럼 두 가지 장소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에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시간은 주인공의 행위에 의해서 느낄 수 있는 경험적 시간밖에 없다. 요컨대 時空이 하나로 모아지고 인물에 의해 초점화되면서 장면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또한 인물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구비전통을 받아들인 漢詩는, 시적 화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일방적 진술과 형상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인의 객관적 시점으로 한시화 할 경우, 민요의 정감과 내적 운율을 그대로 재현시키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민요를 수용한 경우, 시적 화자가 시인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예다. 구전가요거나 구비이야기이거나 간에, 그것은 歌唱者나 口演者에게 일어났던 체험과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를 재현시키는데는 單一時空에 근거하여 장면제시적 수법을 취하는 것은 적절한 형상방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비를 향유하는 계층이건 시로 기록하던 시인이건 간에, 대개는 체험과 사건으로부터 한 정황을 끄집어내어 작품화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경우, 시인은 단일시공을 통해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비내용의 상황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 되도록 하는 특효를 창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비를 수용한 작품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에 근거하여 다소 변형을 가한 경우도 있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구비를 수용한 작품이 이러한 경향성을 보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時空 속에 사건이나 장면을 모으는 이러한 방식은 현실의 사실적 재현, 그리고 등장인물의 생동한 포착에 탁월한 효과를 보게된다. 이 점 한시의 형상화 방식상 진주목할 만한 사안이며, 현실주의적 창작수법과도 상통하는 바 있는 것이다.

3) 詩語의 多樣性과 情感의 확대

한시는 일상어가 아닌 관념적이며 관용적인 詩語 구사가 많다. 용사의 빈번한 사용과, 당대 생활현장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시어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구비전통에 기반한 한시 작품들은 대상을 民의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민의 현실적 삶의 논리에 입각하여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하지만 민의 체험이란 단일하지 않고 구전되면서 적층화되거나, 더러는 다양한 체험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현실체험의 재현을 구성의 원리로 삼아 작품으로 형상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경우, 시어의 驅使와 시어의 措置가 관건이 됨은 당연하다. 더욱이 구전내용을 선명하게 재현하다보면, 시어 뿐 아니라, 형식상으로도 변모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漢詩의 관념적 언어나 공식적 표현, 그리고 관념적인 用事의 구사로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鼕鐺鼕鐺鼕鐺           동당동당동당        

湖南退妓海西娼        호남 퇴기 해서 창녀 

一佛堂何爭             한 불당에 무어 다투랴.

我社堂汝社堂           내 사당 네 사당 하면서

箇處人海人山傍         아무데고 인산인해 될라치면         

暗地入手探裙裳         몰래 손 집어넣어 치마 속 더듬는다.  

汝是一錢首肯之女娘    너는 한푼 돈에 몸을 허락하는 계집이요

我又八路不閾之閑良    나는 팔도에 거칠 것 없는 閑良이로다.

朝金郞暮朴郞           아침엔 金서방 저녁엔 朴서방

逐波而偃隨風狂         물결 따라 바람 따라

一般布施茶酒湯32)       일반 보시 술 한잔에 국 한 그릇


洛下生 李學逵(1770~1835)의 <乞士行>의 일부다. 작품은 각 지방의 흥행처를 떠돌면서 놀이판을 벌이는 사당패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인용 부분은 연행하면서 부르는 장타령의 일부이다. 시의 전체구성도 ‘鼕鐺鼕鐺鼕鐺’하고 치는 소고소리를 제외하고는, 타령조 가락을 한시에다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특히 소고 소리를 중심으로 그 타령의 내용이 바뀌는데,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 변하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이어지도록 재현하고 있다. 우리는 乞士의 행동을 통해 時空 또한 알 수 있는 바, 時空은 다름아니라 연행현장이다. 시어의 표현이나 시어정감은 매우 평이한 구어투이자, 거의 타령조와 같은 口氣가 물씬 느껴진다. 더욱이 가락에 담겨져 있는 정서는 거의 민중적이다. 매음하는 것과 같은 음란한 장면이나, 거친 사설, 그리고 장황하고 거친 내용은 기존의 한시에서 드러난 표현정감과도 전혀 딴판이다. 시어의 구사나 시어의 배치도 한시적 어법과 거리가 멀고, 이미 정형화된 한시어와도 사뭇 다르다. 대뜸 서두에 의성어를 제시한 것도 매우 특이하다.

이는 작가의 주관적 언어가 아니라, 장터나 이 집 저 집 떠돌면서 부르는 장타령 가락을 대폭 받아들인 결과이다. 사실 이렇게 부르던 가락은 이야기에 비해 역동적이다. 대체로 가락은 발화되어, 행동화된 소리에 의해서 울리기 때문에, 그것은 현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漢詩에서 이를 재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漢詩에서 의성어의 사용은 작법상 금기시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시에서 이러한 수법을 구사한 것은 연행과 행동이 펼쳐지는 耳聞目睹한 현장을 생동하게 재현하려한 결과이다. 우리는 한시양식이 보여주는 언어구사나 미적 인식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상층의 삶과 그들의 계급적 속성에서 나왔음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위의 작품과 같이 口碑에 기반한 漢詩는 시어의 다양성을 견인하고 있고, 그 견인은 결과적으로 한시의 미적 기반 내지 형상적 원리 등에 변모를 가져오게하는 동인이 되는 바 있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보기로 하자.


薄雪寒不斂       진눈깨비 날려 추위도 가시지 않았고요

尙看春色遠       봄빛마저 상기 멀었건만

先着儂兩臉       내 두 뺨에 먼저 봄이 왔어요

願郞莫嗔儂       낭군 님 저를 탓하지 마세요

錦衾共纏繞       비단 이불 같이 덮었으니

那得識儂身33)    어찌 제 몸인 줄 알겠어요


이안중의 작품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고백하듯이 표현하는 방식이나, 여성화자로 구성한 것 등에서 민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치 民謠의 특정 부분을 한시로 포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漢詩의 情感이나 詩語의 구사는 물론이고, 시적 형식도 매우 특이하다. 여성 정감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나’를 儂으로 표현하여 반복 구사하는 것이라던가, 散文的 詩語 배치, 심지어 韻과 簾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作法 등은, 한시의 破格에 가깝다. 이제 이 작품에서는 한시의 형식마저 부정되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口碑文化는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되어 있고 그 언어도 현재성이 농후하다고 한다.34) 이는 시인이 歌唱현장에서 체험한 것을 고려하여, 창작에서 일체화시키려한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겠으나, 일차적으로는 민요를 수용하여 한시로 형상하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닌가한다. 

특히 童謠를 수용한 경우, 詩語의 平易性과 口語性은 두드러진다.


初月上中閨       규중에 초승달 떠오르자

女兒連袂出       계집아이들 어울려 나와

擧頭數天星       머리 들고 별을 세면서

星七儂亦七35)     별 일곱 나 일곱……


崔成大(1691~1761)의 작품이다. 위의 작품은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 둘……”이라는 ‘별세기’ 동요에서 시적 모티브를 취하였다. 이 동요는 흔히 여자아이들이 해가 지고 별이 나면, 별을 보면서 부르던 동요다. 원동요는 자못 긴데, 위의 시는 민요의 어느 부분을 한시로 포착한 것이다. 詩想의 展開方式도 그렇거니와 詩語의 구사도 동요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머리 들고 별을 세면서(擧頭數天星)”과 같은 표현은 매우 평이하고, 산문적일 뿐 아니라, “별 일곱 나 일곱(星七儂亦七)”과 같은 표현과 시어 배치는 口語的 表現 그대로다. 마치 아이들의 정감이 있는 그대로 베어 나온 듯하다.

이외에도 이러한 예는 다양하다. 尹廷琦는 육자배기풍의 가락을 한시로 옮기면서 “梧桐秋月夜來明, 此地無端暗恨生(오동추야 달이 밝은 밤에, 무단히 남모르게 한스러운 심사)”라 하였거니와, 그 시어는 매우 평이하고 산문식 표현이다. 우리는 이를 읽으면 금방 특정한 노래가락을 연상하게 된다. 결국 가창물을 수용한 대부분의 한시 작품들은 시어와 시어를 배치하는 데서, 이미 기존의 한시작법과는 다른 방식36)으로 결구하고 형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지적해둔다. 대개 가창물을 한시로 포착하는 시인은 일정한 역사적 시공을 거쳐 나온 타계층의 목소리와 언어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時空을 넘나들면서 계층간에 소통을 하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두 개의 세계관 내지 두개의 언어체계가 공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서, 한 작품안에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 바흐찐의 말대로 ‘내적 대화’가 가능하게 되고, 시어의 분화와 다양성이 나타나기도 할 뿐 아니라, 정감의 사실성이 더욱 비옥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점은 중세의 관념적 언어에서 벗어나거나, 공식적 표현에서 일탈하게 되는 의미를 함축하는 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와 정감의 표출은 종국에는 한시의 양식적 변화에 일조 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4) 多重視點

한시의 일반적 서술방식은 시인의 시점에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대상을 형상하거나, 아니면 시인의 시점으로 자신의 정회를 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일원론적인 시점으로, 대상이나 장면이 시인의 시각에 따라 변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어찌 보면 이러한 단일시점은 형상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사실적이고 실감있게 조명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다양한 시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훨씬 객관적이고 실감있게 형상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러므로 시점의 공존 내지 다양성은 형상화 방식상 주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구비를 수용한 한시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시점의 고려는 필수적이다. 이 경우,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시적 대상이 되는 구비담당층의 체험과 시선이 상호 혼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인과 구비향유층이 내적 대화를 할 뿐 아니라, 시인은 구비에 묻어있는 다양한 체험을 공유하는 계기를 가지기도 한다. 이 점에서 多重視點은 형상화 방식의 갱신에 크게 작용하는 바 있는 것이다.

대체로 구비전통의 한시는 여성 화자가 많거나, 또는 화자와 시인의 시점이 공존하고, 심지어 상호 침투하기도 하며, 또한 대리진술과 같이 시점의 혼융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을 통해 알아 본다.


(1)              迢迢樹枝鳥       높다란 가지 위, 새 한 마리

                 自言翁女魂       “저는 아버지 딸의 혼이랍니다

                 翁今渡此水       아버지께서 지금 이 물 건너신다면 

                 應憶兒前言37)    응당 전에 했던 제 말 기억나실 겁니다”


(2) 청태산 백마지기 / 평풍산 도랑배미 / 지슴동동 띄여놓고 / 물가득 실어놓고 / 옥제라 정자밑에 / 시로시로 잠이들어 / 전실아기 잠자는데 / 다신애미 점심사서 / 와서보고 돌아간다 / 아비에게 말을해서 / 자는 애를 죽였구나 / 죽은아이 몸속에서 / 파랑새가 날아나며 / 전실에 난 자식두고 / 후실장가 가지마소 / 노래노래 부르면서 / 간곳없이 날아간다38)


(1)은 최성대의 작품이고 (2)는 <파랑새>라는 동요다. 최성대는 童謠에서 그 모티브를 취해온 것으로 보인다. 詩想도 그렇거니와, 시어의 구사나 구성방식도 동요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본래 동요인 <파랑새>는 계모의 손에 죽은 아이가 새가 되어 구슬피 울었다는 ‘繼母謠’와도 흡사하다. 위의 한시도 동요의 특어느 한 부분을 옮겼다. 민요취가 그대로 드러나는 바, 對話로 시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시적 분위기, 그리고 민요의 주내용을 시로 옮긴 것 등에서 그러하다.

첫 구의 “높다란 가지 위 새 한 마리”는 시인의 목소리이자 가창자의 진술이다. 또한 “저는 아버지 딸의 혼이랍니다. 아버지께서 지금 이 물 건너신다면, 응당 전에 했던 제 말 기억나실 겁니다”는 창자의 목소리이자, 등장인물(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전체 작품은 시인이 唱者의 노래를 대리 진술하는 것으로도 볼 여지가 다분하다. 이 경우, 시인은 시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격이 되겠는데, 이 때 시인은 시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효과를 본다.

한편 다양한 시점의 차용은 대상에 대한 시각을 읽는 잣대가 되기도 하다. 이는 각 대상에 대한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그 대상의 입장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 대상의 입장에서 형상함으로서 시인은 대상과 소통한다. 말하자면 시인과 작중 인물, 그리고 가창자와 서로 대화하고 일체화한다는 점에서 여러 계층의 의식이나 세계관이 소통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詩語와 場面이 배치되고 구성되기 때문에, 민의 정서가 더한층 부각되거나 현실 지향이 확대되기도 하는 것이다.    

위의 경우처럼, 다양한 시점은 비교적 짧은 편폭의 작품에서 구사되기도 하지만, 서사성이 있는 작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 경우, 시점이 더욱 다중화되고 시점의 혼융양상마저 나타난다.

     

纖纖雙鑞環       섬섬옥수 쌍가락지 

摩挲五指於       손가락에 갈고 닦아

在遠人是月       멀리 보면 달일레라.

至近云是渠       가까이선 쌍가락지 

家兄好口輔       우리 형님 예쁜 입매

言語太輕疎       말씀 어이 험하신가.

謂言儂寢所       우리 형님 하는 말씀 작은아씨 자는 방에

鼾息雙吹如       코고는 소리 둘이 로고.                 

儂實黃花子       그런 말씀 마옵소서. 이내 몸 처자이니   

生小愼興居       나면서 지금까지 몸가짐은 조신했더이다. 

昨夜南風惡       지난 밤 마파람이 들이닥쳐             

紙窓鳴噓噓39)    문풍지 떠는 그 소리 참으로 대단하더이다.    

          

“쌍금쌍금 쌍가락지 / 호작질로 닦아내어 / 멀리 보니 달일레라 / 젓에 보니 처잘레라 / 그처녀 자는 방에 / 숨소리가 둘일레라 / 홍당朴氏 오라반님 / 거짓말슴 말으시오 / 동남풍이 디리불어 / 풍지떠는 소리라오.”40)


이 시는 오라비가 자신의 누이를 모함한 것에 대하여 항변하는 것이 주내용이다. 누이가 침실로 남자를 끌어들였다고 모함을 하는 것에 대한 항변이 그 사연이다. 한시는 거의 ‘쌍가락지’ 民謠의 전반부를 옮겨 놓은 듯하고, 내용 또한 민요의 사설과 비슷하다. 서술방식도 민요의 多樣한 視點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섬섬옥수 쌍가락지, 손가락에 갈고 닦아, 멀리 보면 달일레라. 가까이선 쌍가락지”는 대개 서술자의 상황묘사이고, “우리 형님 예쁜 입매 말씀 어이 험하신가.”은 작중의 여성화자의 진술이다. 또한 “우리 형님 하는 말씀”은 작중의 여성화자의 진술이기도 하고 서술자의 진술이기도 하다. 곧 하나의 서술에 여러 시점이 상호 침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작은아씨 자는 방에, 코고는 소리 둘 이로고.”는 오라비의 말이기도 하고 작중의 여성화자의 말 같기도 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서술자의 진술이기도 하다. 이 또한 한 서술에 시점이 공존한 것이겠는데, 바로 다중시점을 차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런 말씀 마옵소서. 이내 몸 처자이니, 나면서 지금까지 몸가짐은 조신했더이다. 지난 밤 마파람이 들이닥쳐, 문풍지 떠는 그 소리 참으로 대단하더이다.”는 여성화자의 시점으로 오라비의 모함에 항변하는 목소리다.

이처럼 한 작품 안에 시인․창자․등장인물의 시점이 단일하게 혹은 혼융되어 표출되거나, 때로는 시인이 대리 진술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고 있다. 소설과 같이 한 작품 내부에서 여러 시점이 혼융 내지 착종되면서, 다양한 시각에서 대상과 장면을 동시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形象化 方式의 새로운 길을 읽을 수 있겠는데, 이 길은 장면의 심층적 재현에 일조하는 바 있다. 이른바 이러한 형상화 바식은 현실주의적 성취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는 바 있는 것이다.

구전 가요의 경우가 아닌 이야기를 옮긴 경우도 마찬가지다.


君不見延津村中老居士   그대들 보지 못했나 延津村의 老居士

持絃乞米行且息         비파를 품에 안고 구걸하며 사는 것을

頂掛破簑蹇一足         머리에는 헤어진 삿갓에다 한 쪽 다리는 절뚝

厖眉垂睫雙瞳碧         휘날리는 눈썹에 푸르런 두 눈동자 가졌구나.

自言嶺南良家子         스스로 “저는 영남의 양가집 자손인데

家在玄風白沙里         집은 玄風 白沙里였지요.

……                     ……

荷杖負帒步蹣跚        지팡이 집고 자루 메고 비틀비틀 걸어가서

乞食西至載寧郡        걸식하며 서쪽의 載寧郡에 이르렀지요”

有人相逢延津村        延津村에서 어떤 사람 만나서

自語平生雙淚抆        지나온 삶 이야기하며 눈물을 닦았답니다..

我聞此語仍太息        나는 이 말 듣고 크게 한숨쉬었네

榮辱悲喜奈命何        영욕과 희비는 운명이니 어찌 하리요.

欲將金沙居士歌        장차 金沙居士歌를 지어서

寄與世上公卿家41)      세상의 공경대부들에게 부치노라.


이 작품은 海石 金載瓚(1746~1827)이 載寧의 延津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곳에서 전해들은 어느 樂師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엮은 서사한시이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1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 속에서 기구한 운명을 헤쳐 나온 한 악사의 인생역정을 술회하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은 載寧의 延津村에 구전되던 이야기를 시인이 듣고서 서사한시로 포착하고 있다. 시인은 導入部와 마지막의 結末部分에만 등장하고, 전체의 진행은 등장인물의 진술, 이른바 고백적 형식을 취한다. 이 구성형식은 서사한시의 일반적 구성법이다. 대부분의 서사한시는 시인이 직접 견문한 일차적 경험을 포착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특정 지방에서 구연되던 이야기를 듣고 옮긴다는 점에서, 시인의 견문은 이차적이다.

시의 導入部는 시인의 진술이다. 그 뒤부터는 악사의 인생역정을 고백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외형상 樂師의 독백인 듯하지만 사실은 구연자의 진술이다. 즉 이것은 시인이 악사의 獨白인양 처리한 것에 연유하는 바 있다. 이 점에서 악사의 獨白은 구연자의 그것과 착종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를 달리 보면 구연자가 악사의 목소리를 대리 진술한 것으로도 볼 여지도 있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 부분에서는 “延津村에서 어떤 사람 만나서, 지나온 삶 이야기하며 눈물을 닦았답니다”라고 되어 있거니와, 이는 口演者의 이야기이자, 또 시인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끝에 있는 정회표출은 시인의 목소리이다. 이처럼 구전되던 이야기가 口演者의 입을 거쳐서 漢詩로 정착되는 경우, 한 작품 내에서도 시점의 혼융과 다중시점의 사용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심지어 이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구사되는 경우도 있다. 대개 口演過程을 거쳐 성립된 서사한시의 경우, 이러한 시점의 혼성 내지 다중적인 시점의 차용이 많다. 이 역시 구비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초래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視點의 多樣化 내지 혼융양상은 고정된 시각을 넘어서 여러 계층의 시각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이는 하나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다중적 시각을 통해, 대상과 세계를 일면이 아닌 다면적으로 봄을 의미하며, 고정된 인식 틀을 부수는데 작용하는 바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본고는 이조후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口碑受容과 漢詩의 변모양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口碑性과 記錄性을 변별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둘의 교섭, 요컨대 구비전통이 한시에 들어오면서 어떠한 작용을 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인 한시는 어떻게 자기를 갱신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즉 둘의 상호 관련성을 보다 주목하였다. 사실 한시에 수용되었던 구비물의 원형태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원형태가 아니라 그 구비물이 한문학의 양식에 기록물로 정착된 것으로 만 알 수 있다.

그러나 구비물이 비록 동질의 것이라 하더라도, 구연자나, 구연상황 그리고 시공의 차이에 따라, 그것 또한 단일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어떤 것은 구비전승과 함께 적층화되면서 본래의 구비내용과 어긋나거나, 혹은 원내용에 다른 것이 덧붙여진다거나, 또는 변개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구비성이나 기록성을 논할 때, 걸림돌이자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口碑言語와 漢字가 가지는 언어적 변별, 그리고 구비문학과 한문학이 지니는 그 변별성을 중심으로 만 논한다는 것 자체는 기실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유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점에서 두 양식의 관련양상에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조후기의 제양식은 당대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자기의 혁신을 이룬 바 있었거니와, 제양식이 당대현실과 대화하는 중매자는 바로 구비전통이다. 더욱이 구비전통은 중매자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이조후기 제양식의 발전과 변모에 산파의 역할을 자임하는 바 있다. 예컨대 傳이 口碑傳統과 결합하여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野談의 발전과 漢文短篇의 출현에도, 기실 따지고 들면 그 공로는 당연 口碑에 돌려질 것이다.

漢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 시기 가장 완고한 양식이었던 한시마저도, 전시기에 비해 구비와 접촉하고 이를 수용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기실 이러한 양자간의 집중적 접속은 한시의 변모에 적지 않은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민요취향의 대두는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거니와, 이같은 양상은 서사한시의 길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는 바 있다. 口碑傳統은 한시의 완강한 성벽을 변모시키는데 적지 않게 간여하고, 한편으로는 형상화방식의 개척에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시가 수용한 구비물은 실로 다양한 바 있다. 민요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나 說話 심지어 타령조나 육자배기와 같은 민의 삶에서 나왔던 제양식들이 그것인데, 한시는 이를 토대로 更新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비전통은 形象化 方式에서도 작용을 하여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개척하는 밑거름이 된다. 예컨대 구비물의 수용으로 인한 이야기식의 서술방식은 서사한시상,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가교가 된 바 있고, 時空의 單一化와 場面提示 手法은 한시의 現實主義的 成就에 기여하는 바 있다. 또한 詩語의 多樣化와 情感의 事實的 확대는 한시의 형식을 변모시키는데 역할을 하기도 한다. 多重視點의 驅使와 적절한 활용은 이조후기 한시의 변모 뿐만 아니라, 여러 서사양식이 교섭하고 변모하는 양상을 이해하는 잣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더욱이 다중시점은 소설적 수법에 통하는 서술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바 있는 것이다.

구비와 한시양식, 나아가 구비와 한문학 양식이 교섭하고 만나는 것 자체가 전환기의 이조후기적 상황과 일정정도 整合性을 가진다. 이조후기 문학사의 특징적 징후는 바로 口碑를 중심 축으로 諸敍事樣式이 상호 넘나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한시양식이 다양한 과정을 통해 口碑傳統과 交涉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조후기 문학사 이해의 또다른 길이될 수도 있을 것이다.42) 요컨대 한시가 다양한 구비물을 집중적으로 수용하여 형상화 방식을 갱신하는 촉매제로 삼고, 이를 계기로 자신을 변모시키는 것은 李朝後期 敍事學을 읽는 중요한 길이자 징표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구비를 수용한 한시의 변모와,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樣式을 추구하는 것은, 그 앞에 본질적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言語와 樣式의 문제다. 기실 한시의 ‘變貌’도 따지고 들면 이 언어 문제와 한시양식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구비를 수용한 한시도 새로운 양식의 창조나, 시어에서 한자라는 언어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변모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전가의 보도처럼 주장하는 ‘朝鮮風’이니 ‘朝鮮詩’도 기실 그 근원을 따지고 들면 口碑傳統을 십분 이해한 토대 위에서 논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본고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다른 敍事樣式과 口碑傳統의 관련양상과 그 변모에 대한 논의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출처 : 전국한시백일장
글쓴이 : 麟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