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동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 중 오행의 기본개념
한동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의 한 구절입니다. 한의학을 공부하려면 기본적으로 음양오행의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음양관은 이미 김홍경선생님께서 많이 말씀하셨으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행의 개념을 설명하는 자료가 많이 있지만 이처럼 명쾌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저자에게 실례가 되는 것은 알지만 일부 내용을 옮겨 봅니다.
한의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아시고자 하는 분들은 한번쯤 ‘우주변화의 원리’를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도 검은 것과 흰 것만 구분하는 수준입니다. 언제나 그 심오한 세계를 알 수 있을지.ㅠㅠ 특히 홍경사랑 회원님들은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하 옮긴 글입니다. 한동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 60쪽에서 75쪽입니다. 저자의 양해를 바랍니다.
오행의 기본개념
우주의 운동원질을 목화토금수의 다섯 가지로 명명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오행의 개념을 연구하여야 한다.
목화토금수라는 것은 나무나 불과 같은 자연형질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목화토금수의 실체에는 형과 질의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행의 법칙인 목화토금수는 단순히 물질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상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와 형이상을 종합한 형과 상을 모두 대표하며 또는 상징하는 부호인 것이다. 오행이란 이와 같이 형질을 모두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점은 상에다가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이 아니고 이면에서 율동하는 생명력인 상, 즉 운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철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행의 개념이 형과 상이나 유와 무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다면 이것은 그 개념의 불완전함을 뜻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반면 이와 같은 불비한 개념으로써 율동하는 자연의 진상을 측정하기는 너무나 부자유할 것이다.
개념설정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설정법칙(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는 법칙)을 무시할 때에 희랍의 자연관과 같은 실수도 생겨날 것이고 또는 오늘의 기계관과 같은 근시안적 방법도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수학은 철학의 기본이며 또한 사색의 안내자인 오행의 기본개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형과 기를 자유로이 대표하며 상징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자연 그대로의 형상인 기본법칙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인간이 임의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계시이며 또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변화하는 대자연의 본질을 관할하여 보면 이것은 형도 기도 아닌 것으로서 다만 분열과 종합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우주변화의 일대환상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운동하는 모습에는 영원히 항구(恒久)란 있을 수가 없고 다만 감응과 항구가 반복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직관하고 움직이는 자연 그대로, 다시 말하면 그러한 자연을 측정하며 또한 탐색하기에 가장 알맞게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 직관이란 말은 정확히 관찰한다는 말이지 결코 보고 느낀 대로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에는 항상 자기 주관이 앞서기 때문에 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인즉 이것은 직관이 아니다. 근래에 직관을 보고 느낀대로라고 생각하는 개념의 오인이다.
목(木)
목이라는 것은 분발하는 의기를 대표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용력이나 용출하는 모습과 같은 것은 모든 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목기의 성질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에나 동물의 경우에 있어서 힘이 강하다는 말은 목기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즉 목기를 생이나 용출이나 용력 등의 주체로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힘이나 용출이나 용력 등의 주제로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힘이 집중되어 있는 목의 활동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 힘이 집중하고 통일되어 있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에는 생도 용출도 용력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생이라고 하는 그 힘은 여하한 형태이며 또는 무엇 때문에 충족 '집중통일' 되어지는 것일까 하는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물이 모든 변화를 일으킬 때에 음양은 항상 억압과 반발이라는 모순과 대립을 나타내면서 모순 대립 조화의 길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기가 발 할 때는 내부에 축적되었던 양이 외부로 용출하려고 하지만 이때에 만일 외면을 포위한 음형의 세력이 아직 너무 강하여서 이면에 포위당하고 있는 소위 일양의 분출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면 잠복한 바의 이양은 더욱 그 힘이 강화되게 마련인 것이다. 철학은 그 힘이 탈출할 때에 생기는 반응을 목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목기라는 것은 형질간에 일어나는 압력과 반발의 투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즉 그것이 모순 대립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의자나 침대의 용심철(스프링)을 밟으면 밟을수록 점점 반발력이 강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기한 바의 목기의 운동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어휘에서 실로 흥미로운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스프링이라는 단어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의 한 예이다. 즉 spring이라는 단어는 '봄' '용심철' '천수가 용출하는 모습' 등을 표현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생각하여 볼 것은 영국 사람들이 옛적에 이 단어를 만들 때 벌써 우리가 지금 말하는 바의 목기의 원리를 지실知悉하고 spring이라는 어휘로써 이상과 같은 말본을 통일시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spring이라는 단어에는 목의 기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목기는 가장 많은 억압을 받는 것이므로 그 힘이 가장 강한 것이다. 사람에게 욕심이 생기는 것도 바로 목기발생의 원리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욕심이란 것은 자기의 것을 배출하지 않고 포용하려는 것인즉 이것은 천도에서는 공욕이고 인도에서는 사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木이 水를 발판으로 하는 것이므로 힘과 욕심이 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운이 여기에 이르면 순환하는 바의 오행의 위치는 벌써 양지에 접어드는 것이니 그 힘과 욕심이 어찌 그냥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水란 본래 응고가 심하여서 용력을 잠장하고 있을 뿐이고 뜻을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이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목기로 변질되면서 그 힘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氣는 木氣의 모체가 되는 것인 바 그 응고를 위주로 하던 水氣도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응고력은 점점 약화되고 양기는 잠장에서부터 탈출하게 되므로 거기에서 양의 활동은 시작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木氣의 활동이며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수에 있어서도 여기에서부터 火가 끝나는 때까지는 역수를 하면서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것이다. 水氣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바의 木氣는 그가 점점 발전하는 동안 이미 水氣로써 조서하였던 튼튼한 형질은 점차로 엷어지게 되어서 火氣가 시작되는, 즉, 丙位에까지 이르게 되면 자기의 모습은 火氣로 化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오행운동이란 것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발전하는 만물의 운동형태인데 그것을 피상적으로 보면 만물의 천변만화지만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물'의 5단계(목화토금수) 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최초 단계의 운동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기가 발하는 시기는 봄[春]이라고 하며 그 방위를 동방이라고 하는 것이니 봄은 만물의 싹이 통가다리(기본뼈대, 중심)를 유지하는 때의 시기적인 총칭이요, 동방이란 것은 양이 발하는 기본방위를 칭하는 것이다. 그런즉 통가다리가 다시 분열하기 시작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그것은 화기에 속하는 때이므로 춘기는 여기에서 소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을 인생일대에서 보면 목기가 발동하는 시기는 소년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의 지엽을 내기 전, 즉 처녀, 총각의 시절이 바로 인간의 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힘도 많고 의욕도 가장 왕성할 뿐만 아니라 일방으로는 앞으로 올 청년기(분열기)의 준비하는 시기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수기(水氣)의 발전단계이다.
필자는 위에서 발전이란 말을 썼다. 발전이란 말과 전진이란 말은 서로 개념이 다르다. 전진이라는 것은 다만 앞으로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발전은 전진의 모습에 굴신(屈伸)의 상을 겸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굽히고 펴는 상)
다시 말하면 장애물을 극복시키면서 나아가는 상을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계의 운동에는 단조로운 전진은 없고 발전만이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동정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우선 철저한 정명을 하지 않으면 그 연구도 도로가 될 것이며, 따라서 율동하는 자연의 모습이나 현묘한 정신의 소재를 밝혀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이상에서 木의 개념을 설명한 바 물론 이해되지 못하고 넘어간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그 미비점이 풀려 나갈 것인즉 안심하여도 좋다.
화 (火)
화기라는 것은 분산을 위주로 하는 기운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분산작용은 바로 화기의 성질을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우주의 모든 변화의 최초에는 木의 형태로써 출발하지만 그 木氣가 다하려고 할 때에 싹은 가지를 발하게 되는 것인즉 그 기운의 전환을 가리켜서 火氣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작용을 '火'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변화작용의 제2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화기가 분열하면서 자라나는 작용은 그 기반을 木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목이 정상적인 발전을 하였을 때는 화기도 또한 정상적으로 발전을 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목의 발전이 비정상적일 경우에는 화도 역시 불균형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화기가 발전하는 경우에서 뿐만이 아니라 목화토금수의 어느 것이 발전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이 발전하는 모습은 통가다리를 유지하는 것으로써 특징을 지었지만 화기가 발전하는 단계에 들어오게 되면 목기의 특징은 이미 소진되고 분열과 장무라는 새로운 특징과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일 때의 특장이던 만물의 힘이나 충실했던 내용은 외관적인 수려와 공허한 허식으로 바꿔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란 것은 이와 같이 그 상이나 본질이 목에서 분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것을 인생 일대에서 보면 청년기에 접어드는 때이다. 그러므로 진용은 허세로 변해 가기 시작하고 의욕은 차츰 정욕에서 색욕으로 변해 가는 때인 것이다.
주) 색욕이란 것은 내용에 대한 욕심이 아니고 외세에 대한 욕심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목의 경우는 이면에 응결되었던 양기가 애오라지(다만, 오직 겨우 오로지의 예스런 말)외면을 향해서 머리를 든 정도였지만 화기의 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상당한 부분의 표면까지 분열하고 있으므로 그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연의 형질이 점점 약화되는 것은 화기의 때에 이르면 외부의 형과 이면의 질이 서로 투쟁함에 있어서 외형이 점점 밀리면서 확장분열하게 되는 것인즉 그것은 바로 외형이 이질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마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서 장무하는 한 내면적인 상태가 약화되는 반면으로 외면적인 허식을 조장하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를 자연계에서 관찰하여 보면 이것은 꽃이 피고 가지가 벌려지는 때인즉 이때는 만화방창한 아름다움은 위세를 최고도로 뽐내는 때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공허하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형상의 대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형과 기는 언제나 그 세력이 병행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소장하면서 외면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사시에 배속시켜 보면 하절이요 방위로는 남방에 속한다. 여름은 외형은 무성하지만 내면은 공허해지는 때이므로 생장의 역원은 끝나고 노쇠의 바탕이 시작되는 때이다.
토(土)
위에서는 목화의 생장과정을 말했다. 만일 우주간에 있는 모든 생장분열이 무제한으로 발전만 한다면 인간의 키는 수천 척에 달할 수도 있을 것이요, 수목의 높이는 하늘을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도에는 반드시 마디가 있으므로 비록 발전이 생장과정에 있다고 할지라도 맹목적인 전진만을 하는 것은 아니고 오직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은 마디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발전하기 위한 마디인 것뿐이고 통일하기 위한 큰 마디는 아니다. 큰 마디는 지금 논하려는 바의 토(未)의 과정이 바로 큰 마디이다. 여기서 통일과정이 들어오는 이유는 첫째로 생장을 정지하고 성수로 전환하려는 것이요 둘째로는 金火의 상쟁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면 금화상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릇 천도의 운행은 목화의 과정에서 생장과 분열을 하던 것이 토에 이르러서 중지되고 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천도는 무제한의 생장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장은 성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다시 금수로 통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화기의 염열은 금수로써 종합해야만 성숙을 돕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행의 성질 가운데서도 특별히 금과 화의 성질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발전이 끝나게 되어서 금이 화를 포장하려고 할지라도 화의 염열은 금기의 형성을 능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금과 화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견원지불화를 지니고 있는 것인즉 어떠한 다른 기운이 중재하여 주지 않으면 금이 화를 포장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형태를 금화상쟁이라고 한다.
우주운동이 자기의 동정운동을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토와 같은 중화성을 지닌 기운을 투입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폐단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토인데 그러한 토도 또한 넷이 있어서 사대절(四大節)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未土인데 그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바의 금화상쟁을 막는 土이다. 그렇다면 土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토기란 것은 그 성질이 화순하여서 불편부당하는 절대중화지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장인 발전의 편도 아니고 수장인 성수의 편도 아니다. 그런즉 그것은 동적인 양작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적인 음작용을 하는 것도 아닌 성질이므로 이것을 '中'작용이라고 한다.
토는 이와 같은 공정무사한 中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그 덕으로써 목화의 무제한한 생장을 제한하는 것이니 마치 탄소원자의 작용과도 같이 분열을 통합시켜서 성수의 과정으로 유도하는 유일한 적격자로서 군림하는 것이다. 토는 그 밖에 만물을 번식시키며 또는 살찌게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그런데 번식이나 비대라고 하는 것은 목화토금수와 같은 일반적인 특징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고 토의 중화성, 즉 그의 자연적인 조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살찐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요 또 번무하는 것은 세포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즉 비반과 번무하는 것은 세포의 평화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즉 비반과 번무라는 것은 동물과 식물에 대한 특수한 개념인 것뿐이고 사실상 그 의미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라거나 세포의 번식이라는 것은 전혀 토의 중화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우주이든 소우주이든 그 평화는 이와 같은 토의 자연성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변화의 제3단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의 사람은 욕심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토기의 기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토라는 것은 화기가 무한분열할 대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즉 토는 유형이 무화하게 되면 그 무화를 발판으로 다시 有의 기초창조하는 지점이므로 이것을 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가 사계(四季)에 배속하면 장하가 되는 것이니, 장하란 것은 화의 실력이 아닌 허세로써 폭서의 번무를 만드는 때이다. 방위는 중앙에 배속되므로 이 방위가 사방의 주체가 되며 또 '十'자의 중심교차점인 것이다.
그러나 토는 반드시 화기를 발판으로 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작용과 효능의 차이는 있다고 할지라도 사계에는 토가 한개씩 다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계를 土用이라고 하거니와 여기서 다만 未土 중심으로 논한 것은 오행의 성질을 논하는 바탕이므로 토작용의 대표적인 것만을 말한 것이다.
금(金)
우주의 변화는 토기의 공정무사한 황파역으로써 목화의 작용에 종지부를 찍게 하고 거기서부터 금수가 대체하여서 통일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은 통일단계에 접어드는 제 1단계인 동시에 변화의 제 4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금과 목은 그 성질이 전혀 반대다. 목은 이양이 표면으로 분산하려는 발전의 최초 단계였지만 금은 표양이 다시 이면으로 잠복하려는 수장의 최초단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春氣에 있어서는 그 힘이 표면으로 발산하려고 하지만 가을에는 내부에 잠복되어서 고요히 잠들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봄에는 만물들이 외각이 연화하게 되지만 가을이 되면 외각이 점점 경변하여져서 양기를 포장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인간도 봄이 되면 옷을 점점 가볍게 입으며 가을이 되면 차차 두껍게 입는 것은 일포양일산양하는 천도의 원리를 좇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의 피부나 모발은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노장기에 접어들게 되면 용모나 근골이 거칠게 되는 것은 청소년기는 목화의 상승작용으로 인하여 수기가 상승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요, 노장기는 금수가 하강작용을 하므로 표면의 수기가 이면으로 잠복하기 때문에 거칠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음양의 반복작용, 즉 목금의 반복작용 때문인 것이다.
물상(物象)의 이와 같은 현상은 우주운행의 상(象) 그대로이므로 자연수도 여기에서부터는 순행을 하는 것이다. (즉, 자연수가 생장과정에서는 역행했지만 금수과정은 그와 반대로 순행한다는 말이다) 본래 數는 역행하면 분열을 일으키고 순행을 하면 통일하게 되는 것이므로 목화와 금수의 운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기는 목기와는 전혀 반대되는 작용을 하면서 양을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반을 土(未)에 두고 있으며(토를 설명할 때에 금의 기반이 토라는 것을 말했다.) 그 성질은 견렴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금기는 표면을 견변하면서 양을 포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결코 그 이면까지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기소재에는 양성이 상강(尙强)하다. (오히려 굳세다)
이것을 인간에서 찾아보면 목화 때의 욕심은 정욕이나 색욕으로 발전했지만 금에서는 탐욕이 발전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금은 그 성질이 견렴(堅斂)을 위주로 하는 것인즉 그 의지는 결국 견렴성으로써 욕심을 달성하고야 마는 것이지만 목화의 욕심은 그 목적이 정욕이나 색욕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니 그 이유는 탐욕으로 될 만큼의 고집을 부려내지 못하는 것이 목화의 음이기 때문에 그 욕심이 정욕이나 색욕과 같은 천박한 것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장기의 인간은 욕심에 있어서도 청소년과는 다르거니와 그 욕심의 본질을 따져보면 탐욕이야말로 장년의 대표적인 욕심이다. 그러므로 인간 일대에서 보더라도 사, 오십대가 최성기일 뿐 아니라 또한 그 질에 있어서도 이것은 추욕(醜慾)인 것이다.
이 과정은 방위에서 보면 서방이고 계절로 보면 가을이다. 금기는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다음에 올 응고작용의 기본을 이루어 놓는 것이다.
수(水)
만물의 수장작용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토기와 금기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수에 이르러서 비로소 통일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기는 표면을 수렴하는 일을 하였지만 천도는 수기의 작용을 거친 후에라야 그 내부의 깊은 곳까지 응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양은 완전히 수장되어서 만물의 생명을 창조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에 있어서는 정(精)이라 하고 식물계에 있어서는 핵(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음도의 수장은 이와 같은 정이나 핵이 소재하는 위의 외곽까지만 응고시키고 그 정과 핵의 당위는 연성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가 바로 핵과 정신의 부고이며 생명과 형체의 본원이며 통일과 분열의 기반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水'라는 것이니 탈레스가 말한 바의 '물'도 바로 이러한 경지의 '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기는 삼라만상을 창조함에 있어서 형체와 정신을 만드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으므로 형체가 화려할 때는 정ㅅ니이 공허하게 되고 정신이 청명할 때는 형체가 위축하여지면서 분열과 통일의 작용을 반복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물'이 운동하는 변모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우주의 변화를 오행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물'이 변화하는 바의 단계적인 소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실상으로 변화하는 본체는 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수학의 연구목표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천 년의 철학사가 필봉을 휘두르던 곳도 이곳이요, 현묘유심(玄妙幽深, 검고 묘하고 그윽하고 깊다)하여서 찾아내지 못하던 곳도 바로 여기인 것이다. 그러나 동서의 고대 성철들은 한언이유골 이었던 것을!
그렇다면 이와 같이 현묘한 '水'는 어떻게 자기를 발전시켜서 청초한 봄과 화려한 여름을 꾸며내며 장엄한 가을과 엄숙한 겨울을 만들어내었던가? 그것은 물이 자기가 지닌 바의 응고성과 자율성과 중화성으로써 만물을 생성하는 기본존재이므로 우주의 본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그의 응고작용으로써 통일하여서 정과 핵을 창조하고 자율작용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고 중화작용으로써 대립과 투쟁을 조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 자체가 이러한 작용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물'이 지니고 있는 그러한 특징(본질)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천지운동의 기본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이 무엇인가 하면 지구의 운동원리, 즉 지구가 공전, 자전함으로써 거기서 일월이 정기를 던져주는 바로 그 작용 때문에 물이 자기의 기본 존재적 특징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조건 밑에서 움직이는 바를 한 개의 상으로 단일화 한것이 태극도요, 또는 갈라서 설명한 것이 오행과 팔괘의 상인 것이다.
각설하고 위에서는 '물'의 운동 실체와 요인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면 다음은 '물'의 작용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때로는 경험이 진리만큼 진실한 경우가 있다. 나는 수년 전 어떤 원예가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바가 있다. 백합꽃을 크리스마스 때에 내어서 한 몫 보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6,7월에 백합의 뿌리를 영상 4,5 ℃의 냉실에 넣었다가 그것을 온상에 재배하면 그 때에 가서 꽃이 만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우연한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水'의 응고작용을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호라! 위대한 진리가 어찌 백합 한 송이에만 적용되리요, 천지만물이 모두 그 품에서 생하였다가 또 다시 그 품안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것을!
총알은 다질수록 멀리 나가게 마련이며 한 알의 씨앗은 수기의 응고작용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강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무나 배추 같은 것의 종자는 묵었다는 말은 수기의 응고작용을 너무 많이 받았다는 말이다. 가령 일 년을 더 묵었다는 말은 겨울을 한 번 더 지냈다는 말이 되므로 그만큼 응고작용이 가중되는 것이다.
그런즉 싹이 나오는 힘이 많다는 말인즉 우리는 여기에서 '水'의 응고작용이란 것은 곧 생의 원동력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곧 수의 활동이 바로 변화작용을 일으키는 만물의 활동원인즉 만물의 활동이란 것은 곧 수의 활동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인생 일대에 보면 노년기인데 이때는 인간의 욕심은 노욕(老欲)으로 변하는 것이다. 토의 때에 의욕으로 변한다고 한 것은 토의 중화지기이므로 욕심의 편향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토의 욕심이란 공욕이므로 이것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볼 때는 무욕이다. 그런즉 인간의 의지미정을 '意'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토의 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러나 수의 때에 노욕이라고 하는 것은 결행하는 욕심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노욕이란 것은 하려고 하는 일은 꼭 하고야 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에 사욕이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도의 공욕 뿐이기 때문에 하려고 하는 인과율대로 하게 된다.
그런데 더욱이 수는 우주운행의 기본이므로 오행 가운데서도 수의 욕이 행해지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의 실상을 따져서 물[水]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실로 수(水)의 지변(志變)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즉 인간의 노년기라는 것은 진실로 우주의 본원을 창조하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이것을 사시에 배속하면 겨울이요 방위로는 북방이다. 수기인 겨울이나 북방은 상잔지기(相殘之氣)가 있으므로 이것이 죄악의 본원도 되지만 천도로서 볼 때는 이것들은 모두 필요악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형은 이와 같은 수기의 음을 빌어서 이루어지는 것인즉 어찌 유형의 만물이나 인간이 소홀히 할 것이겠는가.
이것이 변화의 제5단계다. 오행의 일반적인 개념은 이것으로 끝마치거니와 이밖에 또 오행이 삼오 이변하는 삼오분기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