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갑골문
1) 갑골문---------------------
갑골문은 중국 은殷(상商)나라의 반경임금이 도읍을 옮기고 마지막 주왕에 이르기 까지 270년간의 고기잡이, 농업, 정벌 등의 결정에 관한 여러 사정이 실린 복사卜辭로서 가장 이른시기의 서적書跡이 되는데 이를 살펴 보면 당시 은나라에는 사실을 기록해 두는 신사信史와 음주및 귀신을 경배하는 삼대특색을 볼수있다 이런 문자는 짐승뼈나 거북의 껍데기에 새겨 진것으로 인해 수골귀갑골문獸骨龜甲骨文이라 이름하고 또 문자가 조각칼(계도契刀)로 새겨 그었기에 한편 계문契文, 계각契刻이라고도 이름하며 문자의 안에는 극소수의 기사紀事에 속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당시 왕공王公들의 문복問卜한 기재이기에 복사卜辭 혹은 정복문자貞卜文字라고도 일컬으니 점단의 방법은 대개 어떤 사정을 갑골에 적고 결과의 묻는 답이 yes 와 no의 양단 형태로 적어 묻는 식이며 큰글자와 작은 글자에 각기 주사와 석묵을 메꾸기도 하고 갑골판의 중앙에 종선을 긋고 여기서 서로 대칭되는 편의 글자에 각기 주사와 먹이 메꾸어진 것도 있으며 이밖에 갑골문자의 출토지방인 하남성 안양현이 원래 은나라의 고도古都 이기에 또 은허문자殷墟文字라 일컽는 바가 된다
갑골문 발견의 가장 이른 시간은 청나라 광서25년 이전이며 발현發現 지점은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항하洹河 남안南岸의 농촌으로 촌사람이 밭갈이할때 토층에서 일단의 귀갑과 짐승뼈의 쪼가리를 파낸 것으로 그중에 대부분이 깊고 판단하기 어려운 문구가 새겨있었다 당시 촌사람이 용골龍骨이라하여 약점藥店에 팔아 이것이 약상거리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는데 광서25년(1899)고고학자 왕의영王懿榮이 발견해서 이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상 진귀적 가치가 있음이 확정된 뒤 학술계에 소개 되기 시작해서 다시 유악、손이양、라진옥、왕국유、섭옥삼 등의 제가諸家가 선후로 수집 고구考究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라진옥이 더우기 전력으로 제창提倡해 비로소 갑골문의 지위가 높게 인식되었우며 갑골학이 저술로서 세상에서 가장 이르게 물어진 것은 유악의 철운장귀鐵雲藏龜로서 광서29년(1903)년의 출판이고 이어서
손이양의 계문거례契文擧例
라진옥의 상복문자고商卜文字考, 은허서계고석殷墟書契考釋, 대문편待問編
상성조의 은허문자류찬殷墟文字類纂
왕국유의 은복사중소견선공선왕고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 와 속고續考
왕양의 보실은허계류찬竹밑甫밑皿室殷契類纂
섭옥삼의 은허구침殷契鉤沈, 설계說契, 연계담지硏契譚枝
주방포의 갑골문자편甲骨文字編
손해파의 갑골문편甲骨文編
동작빈의 갑골문단대연구례甲骨文斷代硏究例, 갑골문자집석甲骨文字集釋
김항상의 속갑골문편續甲骨文編
엄일평嚴一萍의 은상편殷商編, 갑골문단대연구신례甲骨文 斷代硏究新例
요종이의 갑골문속편甲骨文續編, 은허문자갑을편殷墟文字甲乙編이 있고 또 서구의 전교사와 일본학자 등이 있어 또한 민국17년(1928) 중앙연구원에서 계속 발굴하던 때를 전후로 중국에서 갑골문을 수색해 사간 것이 심히 많고 아울러 전문저술로 발표한 것도 많다
근 삼십년래로 갑골학에서 가장 공로자는 마땅히 동작빈이라 할수있는데 동작빈은 일찌기 직접 자신이 갑골의 출토공작에 참여하였으며 그는 은대의 복사를 근거로 장차 과거 갑골학의 연구계단을 앞뒤 두 시기로 양분했으니 전기는 광서25년 기해년 부터 민국16년 정묘년(1899一1927)까지 모두 28년이고 후기는 민국17년 무진년 부터 민국38년 기축년(1928一1949)까지 모두 22년이다
갑골문자풍격의 연변衍變,
갑골문자는 계각체契刻體와 필사체 두종류가 서로 작용하면서 발전해 조성된 것인데 대체로 말하자면 이는 계각체契刻體에서 말미암아 필사체방면을 향해 발전하는 성질의 것이라 할수있다 동작빈은 은대의 복사에 근거하고 점복인의 무리를 파악해 다섯시기로 나누었고 갑골문자의 변화와 자체의 변천, 시대의 추이,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상용자를 예로 해서 그 자형字形을 천명했으며 제일기에서 제5기에 이르는 변화과정중에 각기各期의 갑골문 서사書寫 풍격이 같지 않고 각기마다 그 특징이 있음을 발견했다
제일 웅위기
제일기第一期인 반경에서 무정까지 약 백년의 서풍은 지극히 굉방宏放 웅위雄偉해서 갑골의 큰 판때기와 큰 글자로 대표되는 어려운 작품으로 이런 류의 큰 글자는 늘 강력적이며 새긴 필획은 대단히 거칠고 장하며 아울러 주묵朱墨이 메꿔져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공정工整 하고 수려한 작은 글자도 있어 모두 극히 정채精彩가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중흥 영주英主인 무정武丁의 풍격을 이어 받은 것으로 그 기백氣魄 의 굉방宏放과 기술의 숙련이 자못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 글씨 쓴 자로는 위韋, 영永, 빈賓이 있다
제이 근칙기謹飭期
제2기 조경祖庚에서 조갑祖甲까지의 약 40년의 서풍은 비교적 근칙謹飭하니 조경 조갑은 제1기의 무정을 계승해 지켜 이룬 현군으로 당시의 복사卜師가 규칙을 엄수하고 변화가 작다 그 글씨 쓴 자로는 려旅, 대大, 행行, 즉卽이 있다
제삼 퇴미기頹靡期
제3기 름신에서 경정庚丁까지 약 14년은 서풍이 굴러 변해 퇴폐로 빠졌으니 앞시기의 서가가 이미 작고하고 호방한 서풍이 소지掃地되어 당시기의 서가가 필력이 흔히 유치하고 유약하며 심지어 필기의 오류가 자못 많다 이시기의 글쓴자는 모두 서명하지 않았다
제사 경초기勁山+肖期
제4기 무을武乙에서 문정文丁까지 약17년간의 서풍은 복고풍으로 정인貞人(여기서 貞은 卜과 같은 말로 점복인)은 복사卜辭에서 서계書契 한 자의 이름자를 쓰지 않았다 이 한 시기 무을, 문정시대 신흥 서가書家는 전기의 필력이 유약한 폐단을 모조리 제거하고 작품이 생동하고 굳세고 가파르며 때의 나아감이 방일하여 얽매이지 않는 취趣가 있다 이시기의 서명한 서가는 겨우 적狄 한사람이며 그 나머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제오 엄정기嚴整期
제5기 제을帝乙에서 제신帝辛까지 약89년간의 서풍은 소수의 짐승 머리뼈의 큰글자로 새긴 복사를 제하고는 그 나머지는 모두 이상히 엄숙 공정工整 한데 이유는 정복貞卜 의 일에 왕이 반드시 몸소 친림하니 복사卜辭의 단락과 행行, 자字가 모두 아주 균정均整하며 파리대가리 크기의 작은 승두소해蠅頭小楷 같으며 문풍이 크게 변해 제작이 일신되었다 그 글쓴이로는 영泳, 황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