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退溪의 詩에 對하여
退溪의 詩에 對하여
李 東 歡
1. 退溪의 詩人的 地位
道學의 巨峰으로서의 退溪의 地位는 相對的으로 그의 詩人的 地位에 對한 認識을 消極的이게 해 왔다. 더구나 道學의 立場이 詩와의 共存을 認定하지 않았던 것처럼 誤解해온 것이 這間의 事情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陶山十二曲≫ 等 몇 國文作品은 그것이 國文作品임으로 해서 특히 擧論의 對象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의 二千餘篇의 浩瀚한 漢詩는 그 동안 우리의 積極的인 關心圈 안에 들어와 있질 못하였다.
退溪도 道學者 一般이 그러하듯이 詩는 末技라 하고1), 文藝에 工巧하려는 것은 儒가 아니라고 했다2).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 退溪가 詩 또는 文學 자체를 否定했다고 생각한다면 速斷이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詩 또는 文學에 대한 道學의 相對的인 優位를 强調한 말일 뿐이다. 人間이 하는 여러 가지 文化活動 가운데 文學이 어느 境遇에나 優位라는 주장이 妥當性을 갖지 못한다면 文學에 關한 道學者들의 發言에 지나치게 反應할 理由는 없다. 道學者가 아닌 杜甫 같은 詩人도 ꡔ文章一小技, 於道未爲尊ꡕ이라고 했던 點을 想起할 必要가 있을 것이다. 道學者들은 실은 文學 自體를 否定한 것이 아니라 文學의 어떤 傾向, 이를테면 「雕蟲篆刻」의 技巧主義나 또는 지나치게 激情的인 것 따위를 排擊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그들 나름대로의 文學的 準據 위에서, 樣式上 다분히 閉鎖的이기는 하지만, 獨自的인 文學世界를 이루어 놓았다.
速斷의 不許는 退溪의 다음과 같은 말과 그의 實際詩作生活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ꡔ詩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 스스로 그릇된다.ꡕ3)했고, 한 弟子[鄭琢]에게 준 편지에서 ꡔ詩는 (비록 末技이나) 性情에 根本해 있으며 體가 있고 格이 있어 진실로 容易하게 하지 못 할 것이다. ··· 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붓이 가는대로 마구 아무렇게나 써서는 비록 一時의 快感은 살지 모르나 아마도 萬世에 傳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ꡕ4)고 했다. 詩作態度의 愼重性 또는 眞摯性을 깨우친 말이다. 「萬世」라는 말은 다분히 慣用的 誇張이기는 하지만 詩를 萬世에 傳할 만한 무엇으로까지 보고 있었다는 點은 특히 留意할 만하다. 그리고 그 自身 즐겨 詩를 짓되 偶吟 一絶이라도 一句一字를 반드시 정밀히 생각하여 完定짓고 가벼이 發表하지 않았다5)고 弟子들은 기록하고 있다. 量的으로 많은 作品을 지었으면서도 그 詩作 態度가 非常하게 眞摯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詩 二千餘篇은 朱子의 千二百餘篇의 倍에 가깝고, 詩를 專業으로 한 웬만한 詩人에게도 밑지지 않을 量이다. 그러나 이 量的인 浩瀚함과, 그리고 詩에 대한 肯定的 發言 및 詩作 態度의 眞摯함이 바로 그대로 그의 詩人的 地位를 保障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弟子 權應仁의 이른바 「澹薄風月」의 逸話6)나, 그의 詩에 對해 體裁上의 缺陷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는7) 點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詩가 過去 文人 一般에게 다분히 消極的으로 또는 批判的으로 받아들여졌던 一面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詩를 보는 눈이 한결같을 수는 없다. 그의 詩에 對해 肯定的인 評價를 한 다른 한 쪽이 있어 왔음도 同時에 想起해야 한다. 그 가운데 權氏의 說을 反駁하면서 退溪의 ≪贈林錦湖亨秀二律≫ 等을 들어 그의 詩的 力量을 높이 肯定한 李瀷의 論評과8), 그리고 許筠이 그의 ≪國朝詩刪≫에서
ꡔ비단 理學만이 아니라 詩에 있어서도 역시 諸公을 壓倒한다.ꡕ
고 한 論定은 특히 留意할 만하다. 周知하듯이 許筠은 鑑識眼이 날카롭기로 유명하다. 여기에 退溪가 自身의 詩에 對해 완곡하게 自負를 내보인 다음과 같은 말을 아울러 吟味해 볼 必要가 있을 것이다.
ꡔ나의 詩가 枯淡해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가 詩에 對해 用力한 바가 자못 깊기 때문에 처음 읽어 보면 비록 冷淡한 것 같지마는 오래 두고 읽어 보면 意味가 없지 않을 것이다.ꡕ9)
이상의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보면 國文詩歌 몇 篇에만 依支해온 退溪의 文學的 側面에 대한 從來의 消極的 認識에서 벗어나 보다 積極的으로 그의 詩人的 地位를 定立, 探求의 對象으로 삼아야 할 根據와 必要는 확실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그에 대한 探究領域의 道學一邊으로부터의 擴充을 企圖하자는 것이다. 그의 詩는 그의 浩瀚한 精神的 容量의 또 다른 一面으로의 對應物인 것이다.
이 짤막한 試圖는 위와 같은 見地에서 그의 詩世界의 一局面을 探索해 보려는 것이다.
2. 退溪詩의 詩的 비전 ━ 超越과 和諧
退溪가 詩에서 自我와 世界를 把握하는, 또는 보여주는 視點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接近하여 그것을 「超越」과 「和諧」라는 두 範疇로 捕捉해 보았다.
退溪의 詩의 바닥을 가장 돋보이게 흐르고 있는 詩人意識은 <淸淨한 世界에의 希求>다. 그의 詩에 頻繁하게 나타나고 있는 「梅花」와 「달」과 「仙」의 이미지는 <淸淨한 世界>의 表象으로 되어 있다. 특히 梅花는 退溪의 집요한 詩的 追求의 對象으로 유명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詩를 보자.
藐姑山人臘雪村 막고산인랍설촌
鍊形化作寒梅魂 련형화작한매혼
風吹雪洗見本眞 풍취설세견본진
玉色天然超世昏 옥색천연초세혼
高情不入衆芳騷 고정불입중방소
千載一笑孤山園 천재일소고산원
世人不識嘆類沈 세인불식탄류심
今我獨得欣逢溫 금아독득흔봉온
神淸骨凜物自悟 신청골름물자오
至道不假餐霞暾 지도불가찬하돈
昨夜夢見縞衣仙 작야몽견호의선
同跨白鳳飛天門 동과백봉비천문
蟾宮要授玉杵藥 섬궁요수옥저약
織女前導姮娥言 직녀전도항아언
覺來異香滿懷袖 각래이향만회수
月下攀條傾一罇 월하반조경일준
≪湖堂梅花暮春始開用東坡韻二首≫10)
「藐姑山人」・「臘雪」・「寒梅」・「風吹」・「玉色」・「神淸」・「縞衣」・「白鳳」・「蟾宮(달)」・「姮娥」・「月下」와 같은 희고 깨끗한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어 그 자체로서 하나의 淸淨한 空間을 이루고 있다. 旣存의 道敎 쪽의 仙界說話를 대담하게 導入시킨 것은 흔히 보듯이 仙界 자체에의 夢幻的인 憧憬에서가 아니라 梅花에게서 어떤 構造를 갖춘 淸淨한 空間의 이미지가 喚起되기에 가장 적합한 媒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ꡔ至道不假餐霞暾ꡕ이라고 仙術을 批判하고 넘어가는 대목에 충분히 示唆되어 있다. 곧 道敎的인 仙界 자체와는 別個인, 詩人이 想念하고 있는 어떤 淸淨한 世界에의 覺醒된 意識의 志向인 것이다. 이 점은 달밤을 읊은 다음의 詩와 연결해 보면 보다 分明해질 것이다.
溪堂月白川堂白 계당월백천당백
今夜風淸昨夜淸 금야풍청작야청
別有一般光霽處 별유일반광제처
吾儕安得驗明誠 오제안득험명성
≪七月旣望≫11)
ꡔ別有一般光霽處ꡕ라 하고 그것을 「明誠」이라는 倫理的 槪念에 연결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光霽處」라는 <淸淨한 世界>가 詩人의 안으로 內在化되고 있다. 이런 內在化는 다음의 詩에서 보다 克明하게 드러나 있다.
明月在天上 명월재천상
幽人在窓下 유인재창하
金波湛玉淵 금파담옥연
本來非二者 본래비이자
≪八月十五夜西軒對月二首≫12)
결국 詩人이 希求하는 <淸淨한 世界>는 外的 志向과 內的 志向의 비전으로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러한 <淸淨한 世界>에의 希求는 그것과는 對立되는 世界, 즉 <混濁한 世界>에 依해 制約된 자리에서 起來된 것임은 이미 豫想되어 있는 바다. 外的 志向의 경우는 위의 ≪湖堂梅花≫詩에서 「玉色」에 對한 「世昏」, 「高情」에 對한 「衆芳騷」, 「我」에 대한 「世人」으로 그 對立關係가 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內的 志向에서의 制約은 詩人[退溪]이 弱冠 무렵에 지었다는 유명한 다음의 詩에 이미 잘 드러나 있다.
露草夭夭繞碧坡 로초요요요벽파
小塘淸活淨無沙 소당청활정무사
雲飛鳥過元相管 운비조과원상관
只恐時時燕蹴波 지공시시연축파
≪野池≫13)
「小塘淸活」에 대한 「燕蹴波」가 그것이다.
역시 잘 알려진 다음의 詩에서는 위의 外的 混濁과 內的 混濁이 하나로 겹쳐져 보다 强한 이미지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黃濁滔滔便隱形 황탁도도변은형
安流帖帖始分明 안류첩첩시분명
可憐如許奔衝裏 가련여허분충리
千古盤陀不轉傾 천고반타불전경
≪盤陀石≫14)
이 詩는 詩人[退溪]자신의 立命의 境地를 形象化한 것으로, 「奔衝」하는 「滔滔」한 「黃濁」은 詩人이 志向하는 <淸淨의 世界>에 對한 <混濁의 世界>의 存在를 아주 分明하게 보여준 경우다.
이와 같이 <混濁의 世界>의 制約으로부터 벗어나 <淸淨의 世界>에로 넘어가려는 志向을 우리는 「超越의 비전」으로 範疇化해도 좋을 것이다. 이 超越의 비전을 가져오게 된 混濁과 淸淨의 對立的 世界觀은 그의 當時現實觀(外的 對立의 경우)과 理氣論에 根據한 心性觀(內的 對立의 경우)에 對應된다.
이 超越의 비전은 다른 한편으로는 自然과의 汎神論的 交感으로도 나타난다.
芸芸庶物從何有 운운서물종하유
漠漠源頭不是虛 막막원두불시허
欲識前賢興感處 욕식전현흥감처
請看庭草與盆魚 청간정초여분어
≪觀物≫15)
人正虛襟對窓几 인정허금대창궤
草含生意滿庭除 초함생의만정제
欲知物我元無間 욕지물아원무간
請看眞精妙合初 청간진정묘합초
≪次韻金惇叙≫16)
生命을 가진 「庭草」와 「盆魚」같은 微物과의 交感으로 「漠漠源頭」와 「眞精妙合初」라는 本體世界로 通하려는 자리에는 超越的 外在神을 認定하지 않는 儒家的 立場에서의 永遠한 不變者에로의 歸依의 念願이 스며 있고, 이것은 또 다른 意味의 超越인 것이다. 이런 發想은 물론 周敦頤의 ≪太極圖說≫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詩에서의 <自然의 意味>를 이해하는 하나의 關鍵이기도 한 것이다. 즉 哲學的 思惟에 依한 自然과의 合一을 「興感」이라는 情緖的 高揚 쪽으로 받아들임으로써 永遠者와의 어떤 信仰的 結合의 氣味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경우다. 다음의 詩 같은 경우는 그러한 結合에서 올 수 있는 喜悅의 劇的 高揚의 한 瞬間을 捕捉한 것으로 보인다.
天末歸雲千萬峯 천말귀운천만봉
碧波靑嶂夕陽紅 벽파청장석양홍
攜笻急向高臺上 휴공급향고대상
一笑開襟萬里風 일소개금만리풍
≪夕霽登臺≫17)
그러나 언제나 自然과의 合一로 喜悅만 있는 것은 아니다.
栽花病客十年回 재화병객십년회
樹老迎人盡意開 수노영인진의개
我欲問花花不語 아욕문화화불어
悲歡萬事付春杯 비환만사부춘배
晩雨廉纖鳥韻悲 만우렴섬조운비
千花無語浪辭枝 천화무어랑사지
何人一笛吹春怨 하인일적취춘원
芳草天涯無限思 방초천애무한사
≪紅桃花下寄金季珍二首≫18)
生滅이라는 自然의 커다란 秩序 속에 吸收되어 가는 有限한 한 現象的 存在로서의 人間을 世俗的인 自我의 자리에서 바라 볼 때에는 위와 같은 悲哀를 回避할 수가 없다. 이러한 世俗的인 自我의 자리에서의 悲哀의 超克을 위해서는 外在的인 絶對者의 媒介없이 世界와 直接 對面하는 儒家의 立場에서는 보다 覺醒된 意識이 늘 要求되었고, 이것이 內的 超越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다음, 「和諧」의 비전은 그의 詩에서 가장 一般的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樂觀的인 그의 世界觀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다. 朱子學의 世界觀이 근원적으로 樂觀的임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위에서 <淸淨한 世界>와 <混濁한 世界>와의 對立的 世界觀을 지적했지만, 그러나 이 對立은 絶望的이고 悲劇的인 것은 아니다. <淸淨의 世界>가 <混濁의 世界>앞에 결정적으로 부서져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主理」의 立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花發巖崖春寂寂 화발암애춘적적
鳥鳴澗樹水潺潺 조명간수수잔잔
偶從山後攜童冠 우종산후휴동관
閒到山前問考槃 한도산전문고반
≪步自溪上踰山至書堂≫19)
꽃의 피어남, 봄기운의 고요함, 새의 지저귐, 물소리의 잔잔함, 그리고 이 사이를 童冠을 거느리고 優閑하게 걸어와 隱棲處로 이른 作中主人公 및 그 動作, 이런 自然과 人間의 事象들이 거의 完美하게 어울린, 和諧의 한 極致境을 捕捉하고 있다. 退溪의 六十一歲 때 陶山書堂에서의 作이다. 이 詩의 作中主人公인 退溪를 이 때 隨行했던 弟子 李德弘이 이 詩에 <上下同流해서 各得其所함을 즐기는 妙>가 있다고 하자 退溪는 이를 是認했다.20) 「上下同流, 各得其所」는 周知하듯이 自然과 人間이 融一하게 어울린, 바로 和諧의 世界像을 가리킨다. ≪山居四時≫를 위시한 그의 많은 田園詩篇들은 대체로 이 和諧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自然과의 合一의 意味도 아울러 가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들 作品의 意境이 결코 千篇一律的인 것은 아니다. 大同小異라 하더라도 그 「小異」에 놓여 있는 作品 個性의 精緻한 把握이 앞으로의 課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結語
위에서 粗略하게 試論한 「超越」과 「和諧」의 비전만으로 退溪의 詩가 다 說明되리라고는 물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退溪의 詩世界의 主要한 局面, 거의 本領的일 것임은 확실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退溪의 많은 抒情詩・田園詩가 단순한 抒情・田園詩가 아니라 그의 哲學的, 道學的 思惟를 그 깊이로 가지고 있을 可能性이 위의 試論으로 드러났다면 退溪의 詩는 주로 이런 각도, 즉 韓國漢文學史上에 哲學的, 또는 道學的 抒情詩의 넓은 한 境地를 열어주는 方向으로 接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接近은 退溪의 道學硏究에도 一定한 寄與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퇴계학보 19집, 퇴계학연구원, 1978.)